한국일보

길 위에서

2016-02-26 (금) 한영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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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마을의 이름)에선 도미 튀김에 반 치 길이의 파를 곁들이는데, 성내에서는 채로 썬 파를 곁들인다.’ 이를 가소롭게 여긴 아Q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성 안의 사람들을 경멸한다.

노신(1881-1936)이 쓴 <아Q정전>에 나오는 얘기다. 타인을 경멸할 이유야 파를 어떤 모양으로 얹어 먹느냐 외에도 많고도 많다. 사람의 색깔도 있고 모습도 있다. 출신지도 있고 뭘 믿고 사느냐도 대단한 빌미가 된다. 요즘처럼 인간이 일반인이냐 유명인이냐로 구분되는 세상에선 유명하지 않으면 업신여김을 받아 마땅하게 됐다. 그래서 악한 쪽이든 덜 악한 쪽이든 기를 쓰고 유명해지려고들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선한 쪽으로 유명한 사람은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있다 해도 많은 경우 미화가 실제보다 심하다.

일반인, 평민이라고 서로를 업신여기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모양새가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이 맞는 걸까? 이민자들 사이에서도 짬만 나면 유명인 누구에게서 가지를 친 저 먼 ‘소속’, 또는 ‘미국으로 이민 오기 전’의 ‘양반 타령’이 늘어진다. 말들은 대개 남들을 압도하고 싶은 이런 말들이다. 말의 먼지라도 뽀얗게 일으켜야 천지를 호령하며 황야를 달리고픈 숨겨온 본성을 다스릴 수 있게 되나 보다. 트럼프가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막말의 대리만족 때문인지 모른다.


기사를 쓰기 위해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 미주 한인들도 참 편견이 많고 때로는 근거 없이 오만하다는 점이다. 자부심이 지나치다 싶을 때도 있고, 과시가 병적 수준임을 목격할 때도 있다. 자본주의의 본고장 사람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한인들도 많다.

겉으론 보이든 안 보이든 노욕과 사욕으로 안으로부터 멍드는 집단들을 보지만, 그래도 한쪽에선 참한 인간군이 솔솔 등장하고 있는 것도 목격한다. 꿈을 너무 크거나 너무 작게 잡아 지나치게 꽉 차거나 지나치게 헐거운 학생들도 아니고, 너무 심심하거나 너무 조급한 중년들도 아니고, 막무가내로 외롭고 억울한 노년도 아닌, 청춘을 이제 막 벗고 인생의 진짜 옷으로 편하게 갈아입은 3,40대의 사람들 속에서 뜻하지 않게 이런 신선함을 본다.

파를 어떻게 썰었는지 시비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경멸하지 않고, 포장이 덜하고, 위선이 어설퍼서 계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신문에 날 생각은 별로 안 하고, 그래도 조용히 열심히 즐겁고 알차고 꾸준하게 동아리를 맺고 산다. 남들도 차근차근 도와가면서.
여기 정면교사가 있다며 희망의 기치를 소리 높여 외칠 것도 없다. 길에서 새삼 주워 든 미래의 희망은 사실 부끄러운 것이다. 우리 모두는 몰라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알면서, 물들어서, 못 하는 것이다.

희망 없이도 잘 사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이다. 희망은 미래의 언어고, 삶은 현재이므로. 누구에게나 남은 시간은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으므로.

<한영국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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