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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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촉석루·의암… 충절의 혼 간직한 고도

2016-02-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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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00년 역사기행’경남 진주-남강 방벽 삼은 진주성, 임진왜란 이겨낸 흔적 고스란히

▶ 3000년전 재현한 청동기문화박물관, 체험학습 안성맞춤

진주성·촉석루·의암… 충절의 혼 간직한 고도

진주성이 남강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남강변은 공원으로 조성돼 산책이나 운동하는 사람이 많다. 진주성 가운데 커다란 누각이 촉석루다. 촉석루 아래쪽에 의암이 있다.

경상남도 진주를 여행할 때는 ‘임진왜란’ 테마를 빼놓을 수가 없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약무호남시무국가’ (若無湖南 是無國家·호남지방(전라도)을 빼앗기면 국가, 즉 조선도 멸망할 것)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이 같은 논리라면 진주를 일컬어 ‘약무진주 시무호남’ (若無晋州 是無湖南)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주는 예로부터 남부지방의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말이다. 진주관광의 핵심은 시대를 관통하는 가치에 있다. 이는 청동기시대를 비롯해 조선 임진왜란, 그리고 근대 형평사운동까지 면면이 이어진다. ‘3,000년 역사의 도시’ 진주를 찾아가 본다.
진주성·촉석루·의암… 충절의 혼 간직한 고도

한 쌍의 커플이 의암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바위에서 주논개가 왜군 장수를 안고 투신 했다.


‘ 꽃보다 고운’ 논개

진주 여행은 대개 진주성에서 시작된다. 진주성은 이 도시의 중앙에 남강을 방벽 삼아 우뚝 서 있다. 동문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누각이 보이는데 바로 ‘촉석루’다. 정면 5칸, 측면 4칸 구조로 고려 고종28년(1241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 가운데 우뚝솟은 까닭’에 누의 이름을‘ 촉석’이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왜군(일본군)에게 함락된 후 이곳에서 술판이 벌어졌고 이후 논개의 순국으로 이어진 이야기가 너무 유명해 이후 이미지가 다소 왜곡됐지만 원래 촉석루는 진주성을 방어하는 총지휘 소라고 할 수 있다.

촉석루에서 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면 강가에 ‘의암’ (義巖)이라 는 바위가 있다. 바로 논개가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든 그 바위다. 떨어지는 꽃잎으로 표현되곤 했던 ‘꽃보다 고운’ 논개의 이야기는 1622년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서 처음 나온다. 유몽인이 임진왜란 직후 어사로서 진주 지역을 방문해 전해 들은 “진주목의 관기(官妓) 논개”를 책에 기록했고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의기’설이 정착됐다. 촉석루 옆에는 논개를 모신 ‘의기사’ (義妓祠)라는 사당도 있다.


이후 원래 기생이 아니고 기생인척했다는 주장이 부각된다. 출생에 관한 내용은 1800년 쓰여진 ‘호남절의록’에 있다. 전라북도 장수에는 ‘논개 생가’가 있다. 장수군청의 소개에는 “논개는 장수군 장계면 주촌마을 사람으로 아버지 주달문(그러므로 그녀의 본명은 주논개다)이 어릴 때 죽고 어렵게 살다가 당시 장수현감이던 최경회의 소실이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최경회가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맡으면서 진주에 주둔한 후 2차 진주성전투가 발발한다.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전사하고서도 주논개는 살아남았다가 촉석루에서 열린 왜군의 승리 술잔치에 기생으로 위장해 적장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졌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아홉이었다”고 돼 있다.

촉석루를 지나면 영남포정사·북장대·창렬사·호국사·국립박물관 등 많은 건물이 있다. 이중 국립진주박물관은 국내 최대의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이기도 하다.
진주성·촉석루·의암… 충절의 혼 간직한 고도

“백정도 사람이다” 라고 외친 형평사운 동을 기념하는 ‘형평운동기념탑’ 모습.


“ 진주가 없으면… 국가도 없다”

앞에서 ‘약무진주 시무호남’이라까지 말한 것은 임진왜란 때 진주가 했던 역할 때문이다. 진주성에서는 두 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는데 각각 1592년 10월과 이듬해인 1593년 6월이다. 임진왜란 첫해인 1592년 1차 진주성 전투는 3,800명의 군사로 2만여 왜군을 막은 대승이었다. 임진왜란 3대 대첩에도 포함된다(나머지 2개는 행주대첩과 한산대첩이다). 1차 진주성전투는 왜군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아 장기전을 가능하게 했다. 2차 진주성 전투는 그해 4월 왜적이 한양을 잃고 남해안으로 후퇴한 상황에서 전라도를 점령하고 남부지방에 교두보를 구축하기 위해서 진주성을 다시 공격한다. 왜군 10만여명이 동원됐다고 하는데 결국 진주성이 함락된다. 하지만 왜군은 남원에서 침략을 멈추고 호남지방은 보전된다.

진주에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진주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라도 남원과 전주가 손쉽게 점령됐고 이순신의 명량대첩의 승리로 겨우 반격할 수 있었다.

‘ 3,000년 전 역사 속으로’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

진주는 국내 청동기시대 최대 유적지이기도 하다. 진주시 대평면에는 국내 유일의 청동기시대 전문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이 있다. 2층 높이의 상설전시장에서 3,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부 경남 지역의 청동기시대 토기·옥·석기 등 500여점의 진품 유물이 전시돼 있다. 청동기시대의 움집과 목책, 무덤군을 조성해 놓은 야외전시장도 아이들 체험학습에 좋다.


진주 청동기시대 유적은 남강 다목적댐(진양호)으로 인한 수몰예정지역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일부 유적은 한반도 청동기시대 하한선인 BC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각 지역들에서 발굴된 유물만도 총 1만2,000여점에 달한다. 환호(둥글게 방어용 구덩이를 파놓은것)와 목책으로 둘러싸인 마을로서는 국내 최대 주거지가 발굴된 대평면 대평리에 진주청동기문화박물관이 2009년 개관했다.

‘ 백정도 사람이다’ 형평운동기념탑

진주에서 꼭 봐야 하는 것으로 ‘형평운동기념탑’이 있다. 이 탑은 조선시대 천민이었던 백정들의 신분해방과 인간 존엄의 실현을 도모한 ‘형평사’ (衡平社)의 활동(1923~1935년)을 기념하는 것이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됐지만 사회적 인식은 그렇지 않았다. 차별은 여전했고 특히 백정은 최하층 천민이었다. 1923년 4월 이들백정을 주축으로 양반·상민들 70명이 형평사를 조직한다. ‘형평’이라는것은 저울인데 저울처럼 공정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저울은 고기의 무게를 재는 도구로 백정들이 많이 사용했다.‘ 백정도 사람이다’라고 외친 형평사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됐고 결국은 만민평등의 토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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