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오만과 집착 앞에 ‘신의 설봉’은 끝내 환상일까

2015-10-23 (금)
크게 작게

▶ 안나푸르나 트레킹

오만과 집착 앞에 ‘신의 설봉’은 끝내 환상일까
“산악인은 스스로를 산악인이라하지 않는다. 그냥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칭한다.” 겸손하다. 일행의 절반은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히말라야 고봉에 수도 없이 도전하고, 네팔을 제집 드나들 듯 방문한 산악인들이었다. 한번 등정을 마치면 두어 달은 흰색을 보기도 싫어진다고도 했다. 네팔 여행이 처음인 다른 일행들에겐 꿈 같은 얘기다. 히말라야는 모든 이들에게 로망이고 도전이다. 세계의 봉우리, 그 설산을 본다는 것만으로 가슴 설레는 사건이다.

인천공항에서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 트리부반 국제공항까지는 7시간이 걸린다. 오른쪽 창가 자리를 잡았다면 운이 좋은 거다. 네팔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리서나마 히말라야를 볼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잡은 것이니까. 조짐이 좋았다. 카트만두 착륙을 30여분 앞두고 비행기 창문 너머로 구름을 뚫고 아슬아슬하게 솟은 하얀 봉우리가 보인다. 사진으로만 봤던 그 히말라야 산맥, 에베레스트가 분명했다.

거기까지였다. 안나푸르나 트레킹거점도시 포카라에 도착했을 때는 상황이 달라졌다. 첫 일정으로 페와호수에서 쪽배를 탔다. 호수 한가운데 신기루처럼 떠 있는 힌두사원 바라히 템플(Barahi Temple)까지 1시간동안 무동력 배를 타고 돌아오는 코스다. 힘 좋은 여성 뱃사공은 레이스를 펼치듯 앞서가는 배를 제치며 가장 먼저 사원을 돌아 나왔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배를 탄 가장 큰 목적은 고원분지(해발 850m) 포카라를 병풍처럼 두른 설봉이 잔잔한 호수수면에 비치는 장면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낮은 건물과 근교뒷산이 호수에 반영된 모습만도 나무랄 데 없이 평화로웠지만, 설산은 짙은 구름에 가려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선착장으로 돌아오자 배위에서 봤어야 할 그 장면을 담은 사진을 판매하는 상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사진 1달러, 벽에 걸 수 있는 큰 사진은 5달러란다. 사실 종이값과 인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었는데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내 눈으로 꼭 보고야 말겠다는 오기만 커지고 있었다.


맛보기에 불과하지만 다음날은 안나푸르나 트레킹이 예정돼 있었다. 10km 남짓 짧은 구간을 걸으며 포카라 시내보다는 조금 더 가까이서 안나푸르나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트레킹 시작지점까지는 포카라 시내에서 약 25km, 네팔의 도로 사정으로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날씨는 잔뜩 흐렸지만 기대를 버릴 수 없었다. 산정까지 이어진 계단식 논 사이로 구불구불한 도로 중턱을 지날 무렵, 맞은편 언덕(네팔에서 해발3,000m이하 지형은 이름도 없는 언덕이다) 너머로 하얀 설산이 조금씩모습을 드러냈다. 안나푸르나 남봉이다. 상상했던 것보다 가깝고 또렷하고웅장하다.

트레킹은 계단 논과 눈높이가 비슷해진 카레(Khare, 해발 1,700m)에서출발이다. 1차 목적지는 오스트레일리안 캠프(2,000m), 조금 전 봤던 설산과 경계를 이루는 산정이다. 마음은 바빠지는데, 발길 닿은 곳마다 눈길을 잡는다. 가파른 계단 곳곳에 살림집이 자리잡고 있고, 등교하는 아이들과 주민들의 미소를 대할 때마다 ‘나마스테(Namaste)’라고 인사를건넨다.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산정에 도달했지만 눈 앞에는 안나푸르나 연봉대신 짙은 구름만 일렁이고있었다. 두어 시간을 더 기다렸지만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정 팀이 처음 개설한 곳이라는 캠프는 지금은 숙박시설(lodge)로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 하룻밤 묵는다면 틀림없이 아침햇살에 붉게 물드는 설산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지만 고집을 피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산정 바로 아래 담푸스(Dampus) 마을로 내려와 점심식사를 하며 2시간여를 더 기다렸지만 날씨는 점점 나빠져 비까지 뿌리기 시작했다. 해발1,800m 담푸스는 롯지를 겸한 카페와 학교까지 있는 제법 큰 마을이다.

거리는 멀지 않지만 해발 600m를거의 수직에 가까운 돌계단을 내려오는 가파른 길이다. ‘트레킹’이라는고상한 말로 포장했지만, 주민들에게는 생계와 직결된 ‘고생길’이 틀림없다. 계단 논을 경작하려면 하루에도 몇 번씩은 이 길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할 테고, 농산물을 실어 내려면그 고단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수 있을까?

다음날 새벽 일찍 차를 내서 담푸스까지 올랐다. 출발부터 내리던 비는 차츰 그쳐갔지만 구름은 쉽게 걷힐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카페에서 가볍게 아침식사와 커피를 시켜놓고 기다려보기로 했다. 카페 주인에게 오늘 같은 날씨에도 안나푸르나를 볼수 있겠냐고 물었다. 주어진 시간은고작 3시간인데 15일 후면 100% 볼수 있다는 속 터지는 답변이 돌아왔다. 9월 말이면 몬순이 완전히 끝나고, 맑은 날이 계속될 거라는 얘기다.

그래, 그건 욕심이었다. 우기도 끝나지 않은 시기에 갑작스레 찾아와 단하루 만에 모든 것을 보고 말겠다는것 자체가 무모한 짓이었다.


신이 빚은 안나푸르나 설봉에 대한 집착을 버리자, 그제야 인간이 빚은 풍경이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산꼭대기에 자리한 마을 아래로 구름이 일렁이고, 그 아래로 눈이 시리도록 파랗게 펼쳐지는 계단 논이 다시금 경이롭고 황홀하다. 이런 장관을두고 아쉬움과 불평이라니. 안나푸르나는 네팔어로‘ 식량(안나)이 풍성하다(푸르나)’는 뜻이란다. 포카라는 설산 고봉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한 겨울에도 영하로 떨어지지 않고, 쌀과 바나나 농사가 잘돼 먹을 게 풍부한곳이다. 가이드는 안나푸르나를 신의축복을 받은 땅으로 해석했다. 가파른 언덕을 깎아 논밭을 일군 그 고단함을 기꺼이 축복으로 받아 들인 삶의 의지에 다시 한번 숙연해진다.

아쉬움에 결국 카트만두에서 히말라야 설산을 한 바퀴 돌아오는 ‘산악비행기(mountain flight)’를 탔다. 국내선에 투입되는 30인승 소형 항공기를 이용한 관광 여객기다. 왕복 1시간도 못 되는 사이에 초오유(8,201m)-눕체(7,855m)-에베레스트(8,848m)-마칼루(8,363m)로 이어지는 히밀라야 고봉을 한 바퀴 돌아온다. 단돈20만원으로 너무나 편안하게 세계의봉우리를 감상하는 과정에는 트레킹에서 맛볼 수 있는 기대와 설렘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직한땀과 노력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겸손함이 생략돼 있었다.


여행메모

●히말라야 트레킹은 열대 우기(몬순)가 끝나는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가 적기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입구에서 맛만 보는 하루 일정에서부터 설산 깊숙이 해발4000m 이상 지점까지 돌아 나오는 일정까지 다양하다.
●대한항공은 본격적인 트레킹 시즌에 맞춰 기존 주1회운항하던 인천~카트만두 직항편을 10월 2일부터 2회로늘린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네팔 국내선여객기는 지정석이 없다. 먼저 기다렸다가 왼편 창가 자리를 잡으면 안나푸르나에서 마나술루로 이어지는 히말라야 설산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카트만두·포카라= <최흥수 기자>choissoo@hankookilbo.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