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 따라 떠난 영주 풍기】
‘정감록’만을 믿고 먼 길을 나섰다.
‘황평양서’(黃平兩西·황해도와 평안도)의 민초들이 난세에 몸을 보전할 최적지라는 ‘교남양백’(嶠南兩白·영남의 소백과 태백 사이)을 찾아 떠난 길이다.
잦은 외적의 침입과 계속 이어진 가뭄, 탐관오리의 횡포에 시달리던 이들에게 ‘전쟁과 흉년, 전염병의 위험이 없는 땅’은 꿈의 터전일 것이다.
구한 말부터 지역 홀대에 시달렸던 평안도와 황해도 주민들 상당수가 이상향을 좇아 엑서더스를 강행했다.
이후 일제의 억압과 분단에 따른 공산화의 위협은 그들의 피난 열기에 더욱 불을 지폈다.
한국의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서격인 정감록이 난세에 몸을 보전할 땅이라 꼽은 10곳의 십승지중 제일 처음에 꼽히는 곳이 경북 영주의 풍기 일대다. 정감록 피난민이 풍기에 집중된 이유다. 30~40년 전만해도 풍기의 60대 이상 인구의 약 70%가 북에서 내려온 이들이었다고 한다.
풍기에서도 정감록이 콕 찍은 십승지는 풍기읍 금계리다. 마을을 안내하는 비석엔 이렇게 적혀 있다. “19세기 말부터 한강 이북 주민들이 이주해 오기 시작하였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야 산다는 설’이 퍼지고 있었다. 병화, 재해, 질병 등 소위 3재가없는 땅, 정감록의 십승지 중 제1지인 풍기의 금계마을로 모여왔다. 그들에의해 인삼 경작이 살아나고 직물(인견)이 이식산업으로 정착하여 성장하였다. 이는 곧 실향민들의 창조적인 사고에서 기인된 모범사례다.”
풍기엔 명주의 본고장인 평안도 영변 덕천 등지서 남하한 직물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족답기를 짊어지고 난세의 피난처 풍기로 들어왔고, 나무에서 실을 뽑은 인견사를 원료로 한 인견직물을 짜기 시작했다.
이후 풍기인견은 큰 인기를끌었고, 이웃 주민들이 기술을 전수받으며 풍기는 인견 산업단지로 성장했다.
한때 인견을 짜는 집이 2,000여호를 넘었고, 읍내의 골목에선 ‘철커덕 철커덕’ 직조기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풍기인삼이 명품 브랜드로 자리 잡는 데에도 정감록 월남인들의 영향이 크다. 개성과 황해도 등지에서의 보다 앞선 재배기술을 익힌 데다 다년생 인삼재배에 선뜻 나설 수 있는 자본을 지닌 이들이 풍기에 정착하면서 그 도움을 받은 것이다.
사실 인삼재배는 풍기가 원조다. 풍기군수였던 주세붕 선생이 나라에 공물로 바칠 산삼을 캐러다니는 백성의 고통이 너무 크다며 산삼의 씨앗을 받아와 직접 재배에 나선 곳이 바로 풍기다. 공교롭게도 그 시배지 또한 정감록 제1 십승지인 풍기읍 금계마을이다.
이곳에서 인삼재배에 성공한 주세붕 선생이 다음에 옮겨간 자리가 황해도 관찰사였고, 그곳에 가서 인삼재배를 전파해 지금의 개성 인삼을 일군 것으로 추정된다.
풍기읍 내에 있는 정통 평양냉면집인 서부냉면도 그 정감록 월남인들이있어 생겨난 곳이다. 지금은 전국의 냉면 매니아들이 꼭 들러야 하는 곳으로 꼽으며 맛집 순례에 나서는 이 집이 북에서 내려온 이들에게 고향의 맛을 선사해 준 곳이었던 것.
주인인 김제세(54)씨에게 물어보니 부모님이 47년 전 문을 열었다고 한다. 평북이 고향인 부친이 내려와서 처음엔 주변 사람들처럼 인견 직물업을 하다가 냉면집으로 업을 바꿨다고 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는 피난 1세대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이들은 이곳에서 고향의 냉면을 먹으며 고향의 기억을 잠시나마 나눌 수있었다고. 서부냉면이란 이름엔 특별한 뜻은 없단다. 주소지가 풍기읍 서부리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영주= 이성원 기자sungwon@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