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순백의 기품이 넘쳐, 과연 위도상사화로다

2015-09-1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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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굿 띠뱃놀이 전승되는 고슴도치섬 위도

▶ 위도상사화 꽃물결 치는 달밤, 섬을 걷는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꽃이 있다.

전북 부안의 지인이 위도에서만 핀다는 고결한 순백의 꽃, 위도상사화를 만나러 오라고 한 건 5,6년 전이었다. 하지만 그 해에도, 그 다음 또 몇 해가 지나도록 찾아가지 못했고 꽃을 보지 못한 아쉬움은 켜켜이 쌓여갔다.

그렇게 벼르다 마침내 찾아간 위도. 배에서 내리자마자 꽃을 수소문했고, 가장 많이 피어난다는 위도해수욕장 주변의 풀섶을 헤집었다. 그리고 마주한 그 꽃.


위도상사화는 역시 급이 달랐다. 한줄기 꽃대 꼭대기에 5,6 송이의 봉오리들이 빙 둘러 꽃망울을 터트린다. 순백의 큼직한 꽃송이와 꽃잎 밖으로 뻗어 나온 꽃술이 독특한 조화를 이뤄낸다. 분명 백합보다 기품이 넘쳤다.

꽃잎의 모양보다 더 눈을 사로잡는 건 꽃의 색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단순한 순백이 아니다. 꽃잎의 안쪽엔 노랑이 감돌았고, 꽃술은 보랏빛을 머금었다. 모든 빛을 털어낸 듯한 그 백색이 모든 빛을 아우르고 있는 듯했다.

꽃과 이파리가 서로 만나지 못하는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의 생태에 사랑의 감정을 녹여 이름한 것이 상사화다. 위도상사화도 백양꽃, 붉은상사화, 붉노랑상사화, 노랑상사화 등 다른 상사화처럼 이른 봄 푸른 잎으로 세상에 나왔다가 봄이 지나면 어느 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리곤 대지가 가장 뜨겁게 달궈진 8월 중순께 새순이 다시 땅을 뚫고 올라온다. 그 순은 하루하루 쑥쑥 자라 연두빛 대롱 끝에 여리고 고운 빛으로 꽃을 피운다.

섬 주민들은 위도상사화를 예쁜 꽃 보다는 맛있는 먹거리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주민들은 위도상사화를 못무리대라 부르며 요즘처럼 꽃대가 올라오면 이를 꺾어다 삶아 머위대나 토란대처럼 나물로 무쳐 먹었다. 꽃이 피어버리면 꽃대가 질겨지기 때문에 꽃피기 전 꺾어버렸다고. 못무리대 나물의 맛은 쌉싸름하면서 부드러웠다고 했다.

위도는 허균의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의 모델이었고, 물 반 고기 반이라던 칠산바다의 조기파시로 흥청거리기도 했다.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로 292명의 목숨을 잃은 끔찍한 기억을 품고 있는 섬은 방폐장 유치 문제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위도상사화의 하늘거리는 몸짓은 섬의 역사와 슬픔을 위무하는 듯도 하다.

섬을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찾은 군락지. 해거름의 노르스름한 빛을 받은 꽃은 더욱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을 드러냈다. 보다 화사해진 꽃에서 문득 신부의 수줍은 미소를 품은 매혹적인 라인의 웨딩드레스가 떠올랐다. 위도상사화는 고혹적인 자태로 인생의 절정과 같은 화사함을 노래하고 있었다.

위도상사화 피어나는 섬은 그 이름에 고슴도치 위(蝟)자를 쓴다.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영락없는 고슴도치 모양이다.


부안 격포를 떠난 여객선이 50여 분만에 닿는 위도의 항구는 파장금. 위도 여행의 출발점이다.

파장금은 고슴도치의 주둥이 부분에 있다. 이 섬의 마을 이름에는 쇠 금(金) 자가 많이 들어있다. 파장금 벌금 논금 미영금 청금 깊은금 등 금이 들어간 마을이 12곳이다.

섬을 구경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해안도로를 따라 한 바퀴 도는 것.

파장금에서 시작해 서해훼리호 위령탑을 지나 위도면사무소가 있는 진리에 이르면 옛 위도관아를 만난다. 조선시대에 위도엔 수군의 진이 설치됐었다. 이 위도진에서 인근 고군산군도와 법성포 군산포 등을 관할했다고 한다.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고개를 넘어가면 섬에서 가장 너른 백사장인 위도해수욕장이다. 위도상사화 단지가 조성돼 가장 많은 위도상사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시 길을 따라 깊은금과 미영금을 지나면 논금해수욕장에 이른다. 아담한 백사장과 바로 앞의 작은 섬들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광을 지니고 있다. 이 아름다운 해변에선 장동건 주연의 영화 ‘해안선’ 과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등이 촬영됐다고 한다.

고슴도치의 앞다리 격인 논금을 지나고, 꼬리 부분인 석금을 거치면 대리마을이다. 중요무형문화재 82호로 지정된 마을 굿 띠뱃놀이가 전해져 내려오는 마을이다. 띠뱃놀이는 매년 정월 초사흗날 행해진다. 마을 뒷산 원당에서의 당굿을 시작으로 마을 주산 돌기와 바닷가에서 용왕굿이 이어진다. 이후 산에서 자라는 띠풀과 짚, 싸리나무 등을 엮어 만든 길이 3m, 폭 2m 정도의 띠배에 허수아비와 함께 떡과 밥, 고기, 나물, 과일 등을 넣어선 먼바다로 끌고가 풀어 놓는다. 이 띠배가 마을의 모든 액을 싣고 멀리 떠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망금봉 밑 산자락엔 내원암이란 작은 암자가 있다. 여승 한 분이 지키고 있는 암자다. 여러 번 중수와 이건을 거쳐 암자의 건물은 예스럽지 않지만 꽤나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이다. 이 암자의 백미는 법당 바로 옆에 있는 수령 300년이 훌쩍 지난 아름드리 배롱나무다. 가지를 뒤덮고 빨갛게 피어난 백일홍이 신산의 세월을 견뎌 낸 나무에 달아준 훈장처럼 느껴진다.

위도상사화 꽃물결 치는 달밤, 섬을 걷는다
위도상사화는 이달 말 절정을 이룬다. 위도상사화가 흐드러지는 29일 위도에선 ‘섬마을 달빛보고 밤새 걷기’라는 생소한 축제가 펼쳐진다. 말 그대로 휘영청 밝은 달밤, 파도소리와 꽃물결이 어우러진 섬을 마냥 걷자는 것.

이 축제는 김종규 부안군수가 아이디어를 냈다고 한다. 지인들과 함께 위도를 찾았을 때 저녁을 먹고 달밤에 백사장을 걷는데 모두들 그 야행에 심취했다고. 이러다 밤새 걷겠다 싶었는데, 문득 이 좋은 걸 축제로 만들어볼까 싶어 시작했단다.

위도 파장금항이 출발지로 오후 6시 30분쯤 모여 달빛걷기가 시작된다. 3개의 코스 중 자신의 체력에 맞춰 골라 돌면 된다.

단거리인 달빛걷기 코스는 파장금항에서 진리, 벌금을 거쳐 위도해수욕장까지 4㎞다. 빠른 걸음으로 1시간 반 정도 예상. 중거리인 바람걷기 코스는 10㎞. 파장금항에서 시름 개들넘길 치도 깊은금 도장금을 거처 위도해수욕장에 이른다. 2시간 반 정도 소요 예상. 장거리인 밤새 걷기 코스는 15㎞에 이른다. 섬을 거의 한 바퀴 돌며 4시간 가량 소요된다.

파장금항에서 위도해수욕장에 이르는 구간에는 섬의 특산물을 활용한 간이 음식점이 준비되고, 곳곳에서 다양한 공연도 벌어진다. 그리고 최종 집결지인 위도해수욕장에선 한여름밤의 콘서트와 캠프파이어 등이 펼쳐진다.


부안=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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