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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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추어가 보는 미국역사/ 미국의 노예제도 (3)

2015-07-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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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환>

남부정치인들은 “노예제도는 국가를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다” 라고 공언하기 시작 하였으며 남부의 대표적 정치지도자로서 부통령을 지낸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Calhoun 상원의원은 “남부사람들도 한때에는 노예제도가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죄악이라고 착각했던 적이 있었다. 아니다. 노예제도는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꼭 필요한 가장 안전하고도 안정된 기반”이라고 주장하였다.

남부 목사들은 성경에 흑인들은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써있다고 설교하였으며 남부 과학자들은 흑인이란 태초에 하나님이 열등한 민족으로 아프리카에 별도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말하였고(1,930년 이후에 독일에서 나치(Nazis)가 이와 비슷한 ‘인종 우생학’ 이란 것을 내놓았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남부 역사학자 들은 고도로 발전한 희랍문화가 많은 노예들이 없었으면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말하고 노예제도란 인류역사상 생겨난 가장 좋은 제도이다 라고까지 주장 하였다.


드디어 기독교도들도 분열되기 시작하여서 1,844년에 감리교가, 1,845년에는 침례교가, 남북전쟁이 난 1,861년에는 장료교가 남북으로 갈라섰다. 멀쩡해 보이는 지도자들이 노예문제에 관한한 ‘정신이상자’같은 주장에 입을 모았었다. 그러나 한 가닥 양심은 남아들 있어서 비남부인 모두가 죄악이라고 비난하는 노예제도를 ‘노예제도’라 부르지 않고 ‘특이한 제도(Peculiar Institution)’라고 불렀었다. 그러면 이 특이한 제도의 실상은 어떠하였을까?

노예제도는 인간인 노예소유주들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이 아니고 사역동물과 같은 재산에 불과한’ 노예 노동력의 절대적인 통제를 의미한다. 노예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존재로서만 의미가 있지 인간이 아닌 그들에게 인권 같은 개념은 적용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만일 어느 노예소유주가 노예의 후생에 신경을 썼었다면 아마 그가 인도주의자이어서가 아니라 일 잘하는 소나 말을 잘 보살펴주는 것과 같은 이유이었을 것이다. 애완용 개도 어떤 사람은 자식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학대하는 못된 “짐승 같은” 사람들도 있다. 노예의 처우도 이와 비슷하였다.

어떤 착한 노예소유주들은 노예와 한 가족처럼 같이 생활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떤 못된 노예주 들은 노예를 너무 학대하고 있었던 탓에 항상 어깨너머로 노예의 ‘반동’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노예가 잘 먹고 건강해야 일도 잘 할 수 있는 까닭에 최소한의 후생생활에 주인들은 신경을 썼다고 한다. 소고기나 돼지고기에서 값싼 부분을 노예들에게 주어서 먹게 해왔던 탓에 지금도 흑인들 사회에서는 저급 고기류를 활용한 특수요리법들이 발달되어 있다. 흑인들에게 글공부를 시키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농장주들 중에는 노예의 아이들에게 글공부를 시켜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노예들이 모두 농장에서 중노동만 했었던 것은 아니다. 여자노예들은 몸종, 식모, 가정부, 유모 등으로 일하기도 하였고 남자노예들 중에는 요즘으로는 고급 기술직인 목수, 대장장이, 가축사육등 기술직으로 일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노예를 애초에 데려온 주목적은 농장노동이었다. 남부에서는 쌀, 담배, 물감원료, 삼베, 사탕수수, 면화 등 극히 노동집약적인 농작물들을 재배하였다. 그런데 이런 농작물들이 판매가에 비해서 너무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서 한때는 노예농장들이 폐쇄되어가기 시작하였다 한다.


씨를 빼낸 면화는 매우 고가를 받을 수 있는 귀한 농작물이었으나 하루에 한 노예가 손으로 반파운드 정도의 면화에서만 씨를 빼낼 수 있었던 까닭에 타산이 맞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무렵 ‘발명의 왕’ 엘리 위트니(Eli Whitney)가 면화씨를 제거하는 Cotton Gin 이란 기계를 발명하자 노예농장들의 운명은 급속도로 호전되었다. Cotton Gin을 쓰면 한 노예가 하루에 55파운드의 씨가 제거된 면화를 생산해 내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 영국과 불란서에서 방직업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을 때이었음으로 면화는 금처럼 귀하게 여겨지기 시작하였고 남부노예농장주들은 ‘Cotton is the King’이라고 말하면서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위트니가 노예제도부흥을 위해서 Cotton Gin을 발명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본의 아니게 노예농장주들의 영웅이 되었다. 이제는 노예 노동력이 다시 왕성하게 필요한 시대가 돌아온 것이다.

노예들이 다 충직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쉬기도 하였고 일을 고의로 조잡하게 하는 노예들도 있었다. 궁극에는 농장을 탈출하는 노예들도 있었으나 백인들이 사는 동네에 몰래 숨어들어가서 사는 것은 극히 어려웠고 체포되어 원주인에게 끌려가 엄청난 처벌을 받기가 일쑤였다. 유럽에서 온 백인 계약노동자들은 도주해서 백인사회에 잠입하기가 훨씬 용이했었고 잡히더라도 대게 원계약만 완수하면 되었다.

남북전쟁 중 링컨이 노예해방선언을 하기 훨씬 전에도 노예를 해방시켜주는 선한 백인들도 있었다. 그 다음으로 선한 백인은 노예가 자기의 휴식시간에 일을 해서 돈을 벌어 가지고 주인에게 돈을 주고 자기의 노예해방을 사도록 해주는 사람들이었다. 이 관행은 가끔 있었던 모양으로 해방된 노예가 돈을 벌어서 자기 부인과 자식들의 노예해방도 주인으로부터 사기도 하였다고 한다.

남부의 노예농업제도는 미국의 산업구조에 심각한, 반영구적인, 영향을 미치었고 남북 간의 대립과 분열이 화해될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다. 저임금의, 아니 거의 무임금의 노예 노동력과 경쟁을 할 수가 없어서 거의 모든 기술자 나 전문가들은, 아니 일반노동자들도, 남부를 회피하였고 새로 들어오는 이민자들도 남부로 가지 않았었다. 남부농장들은 더욱 일손들이 모자라게 되었다.

상업이나 공업에 투자되어야 할 자본들이 노예농장에 묶여서 남부에는 농업 이외에는 다른 산업은 전혀 개발될 수가 없었다. 결국 남부는 원료 (농산품)를 수출하고 완제품 (공산품)을 수입하는 미국 내 북부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거의 모든 고급 직종은 북부인들이 독점하게 되었고, 남부의 농산품들은 북부의 선박들에 의해 수송되었고 면화는 북부에서 만든 Cotton Gin으로 처리되었으며 사탕수수는 북쪽에서 만든 기계로 설탕원액 (molasses)이 되었고, 그 설탕원액은 북쪽에 가서 럼(Rum)으로 변해서 남쪽으로 돌아왔으며 남쪽의 강들은 북쪽의 증기기선으로 가득 찼고, 모든 농기구들은 북쪽에서 가져온 것이었으며, 나무를 팰 때도 북쪽도끼를 썼으며 그 장작을 태우는 벽난로 위에는 북쪽시계가 똑딱거리고 있었으며 마루에 깐 카펫도 북쪽제품이고 그 카펫을 쓰는 빗자루까지 북쪽에서 넘어온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더욱 분통을 터뜨리는 일은 농장주의 부인이 그 카펫 위에서 북쪽에서 건너온 북쪽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이었다.

북부에서 조선업, 선박수송업 등이 활발해지자 남부사람들은 ‘북쪽 놈들이 연방정부의 예산을 유용한 탓’ 이라고 생각하였다. 미국은 이때까지 인컴택스(Income Tax)가 없었고, 거의 유일한 연방세입은 수입관세(Tariff)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미국 공업의 보호를 위해서 자주 관세율을 높여 왔다. 관세의 덕택으로 미국의 공업이 보호되고 육성되는 일은 좋았으나 그 결과로 미국 공산품의 가격도 점점 더 올라갔다. 남부는 덩달아 올라가는 공산품 값을 내게 되었고 공산품을 제조하던 북부는 앉아서 늘어나는 이윤을 챙기고 있었다. 남부사람들의 분통이 또 터지게 되었던 것이다.

“건국 초기부터 워싱턴, 제퍼슨, 메디슨, 몬로, 잭슨 등의 건국과 전쟁영웅들을 배출해낸 우리 남부가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남부사람들은 남부 낙후의 원인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반드시 이런 사태가 일어나게 된 데에는 어떤 계획된 음모가 있다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집행한 자들이 북부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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