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환>
아마 독자들 중에는 “그런기 어데있노” 라고 의문을 제기할 분들이 있으시리라고 생각한다. “와, 없노. 니는 판잣집이 무신 한국 특허 특산품이라도 되는 줄 알았드노”라고 조금 나이가 든 분들은 대답할 것이다. 불과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서울 근교의 “달동네”에 판잣집들이 있었고 실제로 6.25를 경험하신 독자들 중에는 판잣집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분들도 있을 줄 안다.
미국 원주민들만 살던 땅에 처음 발을 내디딘 첫 이주자들이나 그 후 그 뒤를 따라와 “서부로! 서부로!” 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용감하게 개척에 나섰던 초기 이민 1세들 에게는 눈앞에 허허벌판만 있었지 집이라고는 헌집이건 새집이건 도대체 한 채도 없었다.
자리 잡을 때까지 우선 좀 기대볼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빈방도 없었고 다 지어 놓은 집을 융자까지 알선해 줄 테니 사라고 졸라대는 복덕방 아저씨는 더구나 없었다. 목마른 사람 우물 파듯이 이 초기 개척자들은 움막이든 판잣집이든 손수 짓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정식집이라고 지으려면 그때까지 주종을 이루고 있던 영국 사람들의 재래 영국식 집을 지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바로 그것이 문제이었다. 돈도 없고 목수도 없고 목재도 없고 못 값은 귀금속만큼이나 비싸서 번듯한 재래 영국식 집을 짓는다는 일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필자는 30여 년 전에 매사추세츠 주의 ‘Salem’이라는 초기 해변 도시를 관광 했던 적이 있는데 그곳에는 어업으로 부자가 된 사람들의 집들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대게 옛날 우리 한옥 식으로 대문이 꼭 있었는데 대문 바깥쪽으로 큰 못을 더러는 한개 더러는 몇 개씩 몇 줄로 장식용으로 박아 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관광안내원의 설명에 의하면 대문에 박힌 못의 숫자는 그 집 주인의 재산 실력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고 한다. 대장장이가 일일이 한 개씩 망치로 뚜드려서 만든 당시의 못은 10 cm 길이 정도의 값비싼 예술품이었다.
재래식 영국 집을 지으려면 우선 아주 경험이 많은 대목이 기둥, 대들보 할 것 없이 사방 1 foot가 되는 육중한 나무를 다듬어 썼는데 이 육중한 재목들을 못으로 연결하지 않고 재목의 끝을 끌로 조각하여 서로 맞물려서 집의 뼈대를 지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조까지는 궁궐이나 사찰들은 이와 같이 못을 쓰지 않고 조립했었다. 생전 망치 한번 잡아보지 않았던 개척자들에게는 불가능한 건축방법이었다.
1830년에 시카고에 Balloon Frame Building이라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교회를 건축 하였다. 통나무 같은 육중한 목재를 전혀 쓰지 않고 2x4 인치 같은 작은 목재들만을 쓴 건축방법인데 이 교회건물이 완성되는 것을 보자 시민들도 그 공법을 따라 총 시카고 주택의 절반가량이 Balloon Frame House 식으로 지었었다고 한다.
이 건축방법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한 것이었다. 우선 2x4 인치 각목두개를 못들을 박아 한 개로 만들어서 사방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기둥들을 다른 2x4 인치 목재들을 사용하여 연결한다. 기둥들 사이에 2x4 인치 각목들을 매 18 인치 간격으로 중간 소기둥으로 세운다. 마치 굵은 성냥개비로 지어놓은 것과 같은 건물 골조가 지어진다.
이제부터는 아래에서 시작해서 널판자들을 기둥들 위에 못으로 박아 올라가면 집의 외벽은 완성되고 지붕만 얹어주면 집의 외곽은 완성되는 것이었다. 경험 많은 대목들은 이런 집들은 강풍이 불면 마치 풍선처럼 훅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비웃으면서 Balloon Frame House 라고 비꼬아 불렀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Balloon Frame House가 재래 영국식 건물보다 강풍을 더 잘 견디었다. 금상첨화로 또 다른 한가지의 장점은 이 판잣집은 못만 조심해서 빼내면 손상 없이 완전히 분해가 가능해서 집주인이 딴 곳으로 옮겨가서 예전대로 재조립을 큰 경비를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미국 전 주택의 75% 가 이 Balloon Frame House 공법으로 지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민 초기 때부터 심각했던 미국의 주택난, 특히 저소득층의 주택난은 현재까지도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문제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이고 모든 물자가 풍부한 미국이 오늘날까지 저소득층의 주택난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허점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저소득층의 목소리는 작고 저소득층을 위한 자본투자는 우선순의가 아주 낮다. 뉴욕 등의 대도시에는 안락하게 살만한 아파트나 주택은 저소득층의 수입으로는 거의 구할 수가 없다. 저소득층의 주민들은 자연히 slum 이라고 불리는 빈민가에 모여 살수밖에 없다. 이민 1세들이 대게 한번은 거쳐야하는 과정이이다.
한 건물 다세대주택을 Tenement House 라고 부르는데 대게의 경우 최하급 수준의 주거건물들이다. 1800년대 중반까지 많이 있었던 Tenement House 는 한 건물에 최대한의 세대가 살도록 지어진 6, 7층짜리 건물로써 매 층 중간에 있던 방 (집) 들은 창문조차 없었고 더러운 변소를 그 층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어있었고 목욕탕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설계공모로 1880년대에 지어지기 시작한 개량된 Tenement House 는 Dumb Bell House (아령) 이라고 불렸는데 상공에서 이 건물을 내려다보면 아령같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대게 7층으로 벽돌로 지어진 이 건물들은 최소한의 면적에 최대한의 건물을 지을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었는데 매 층마다 양쪽 끝에 두개의 아파트를 들여서 매 층에 네 개의 아파트가 있었고 가운데에 층계와 공동화장실이 있었으나 목욕탕은 여전히 없었다. 화장실이 하도 더러워서 주민들은 직장이나 학교에 가서 용변을 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며 매 건물마다 폐병환자가 한명씩은 있었다고 한다. 이런 건물들이 맨하탄에만 4만 채가 있었고 150만 명이 살았었다고 한다.
이론적으로는 이건물의 모든 방들에는 햇볕이 들도록 설계되었으나 옆의 땅에 불과 56인치의 간격을 두고 딴 건물을 지었던 까닭에 아래층은 햇볕이 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건물사이에 쌓이기 시작한 쓰레기들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창문으로 들어왔으며 불이라도 나는 경우에는 그 좁은 공간이 풀무와 같이 불이 빨리 퍼지게 만들었었다고 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Theodore Roosevelt 뉴욕주지사의 지시로 1900년에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이런 건물 조건이 50년 전보다 더 나빠진 것이기는 하지만 이런 건물들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생활환경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건전하고 올바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청소년문제의 발생과 생활환경의 조건과는 꼭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이론이 나올만한 조사결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