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옥중학교 세운 이승만

2015-02-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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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목사(NY프라미스교회/뉴욕이승만기념사업회회장)

1903년 1월19일자 ‘황성신문’에 ‘옥수교육(獄囚敎育)’이라는 제목으로 옥중학교에 대해서 기사가 났다. 1900년대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에도 없는 옥중학교가 미개한 조선나라에 생긴 것은 놀라운 일이다. 세계최초의 옥중학교는 당시 죄수로 투옥된 젊은 이승만의 아이디어였다.

고종 12년, 1875년 3월 26일 대한제국의 누란의 위기 속에서 태어난 이승룡은 후에 위대한 이승만으로 변화된 것은 전적으로 당시 기독교 선교사들의 영향이 컸다. 20대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서양학문과 기독교 문화에 접한 이승만은 개화사상의 열정이 대단 했다. 배재 학당에서 영어를 배운지 3개월 만에 그는 하급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영어로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한 수재였다.


그는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부터 바로 되어야 하며 배우고 깨우쳐야 한다고 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기독교 정신으로 교화교육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승만은 사람 바로 세우기의 실천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청소년들부터 교육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1903년 3월 8일자의 ‘신학일보’에 의하면 1899년 1월 9일 박영효 측근의 쿠데타 음모에 연유되어 이승만은 구금 수감되었으며 당시 이승만의 글에는 감옥의 규칙을 실감나게 보고하고 있다.

‘당시 감옥 안에서 언문 고담책을 사사로이 보다가 발각되면 곧 빼앗겼다. 오랜 죄수가 공부 하겠노라고 말하면 여기는 학당이 아니라고 했다. 죄수들이 죄를 회개하고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1901년 초 이승만은 새로 부임한 김영선 감옥서장에게 옥중에서도 책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소개하기를 신문편집, 논설쓰기 등의 경험이 있는 자라고 설명을 했다.

청소년들을 잘 교화해야 장차 훌륭한 사회가 발전 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 했다. 옥중에서도 배울 수 있는 길을 마련하자고 간절히 제의 했다. 다행히 새로 부임한 김영선 감옥서장과 간수장이 적극 협조하였다.

열악한 옥중 시설이지만 감방 한간을 비우고 공부방을 만들었다. 수감 청소년들이 가갸거겨를 배우기 시작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어와 영어를 배우기를 자원하는 이들을 가르쳤다. 산수의 가감승제를 가르쳤다. 세계지도를 배우고 각 나라 명인들의 감화 감동의 이야기, 착한 행실 이야기와 성경과 찬송 그리고 기독교 교육을 가르쳤다. 교육책자와 공책은 선교사들이 공급해 주었다.

감옥서장도 감동이 되어 매주 토요일에는 우수한 학생에게 상금을 주며 격려를 했고 배우기를 원하는 선비출신 죄수들을 위해 감옥 방 한 칸을 교실로 쓰게 했다. 감옥에 옥중학교가 있다는 말을 듣고 외국의 방문객들이 감옥을 방문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애국애족 사상과 기독교문화혁명운동에 대한 소문은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당대의 유명한 민속역사학자 이능화는 감옥에 수감된 죄수 신분이었다. 그는 청년 이승만이 감옥에 잡혀 들어와서도 좌절하지 않고 이간개혁운동을 실천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을 했다고 한다. 그 용기와 열정을 보고 감탄하며 “지옥 같은 감옥이 천당으로 변화했다”라고 감탄했다.

이승만의 옥중학교를 적극 도와 준 감옥서장 김영선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 했는데 이 김영선 감옥서장 역시도 이승만의 옥중학교 설립과 인간 사랑과 나라사랑을 위한 인간개혁운동과 교육열에 감화되어 이승만을 극구 칭찬했다고 한다. 이승만의 옥중교육 실천은 인간 사랑과 인간개혁운동의 효시(嚆矢)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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