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순아에게

2015-02-1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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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윤 <교육가>

너의 미국 생활은 아름답기만 하였다고, 기독교 나라에 와서 미국사람들의 친절과 도움으로 순풍에 돛 달듯이 살아왔다고, 또 예수님의 사랑을 알기 바란다고 말하는 네가 어떤 면에선 아름답고 부럽다. 나는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나 또 미국 이민국민으로서도, 사회참여와 직장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길을 걸어왔어도, 너와 같은 말은 꿈에도 할 수 없다고 느낀다.

각자가 각기 자기 우주, 세상에서 자기가 마음이 내키고 보람과 기쁨을 주는 길을 선택해 나가며 스스로의 운명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니까...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쁜 것이 존재할 수는 없겠다. 다만 자신의 행동과 선택이 남의 고통과 역경을 다소나마 덜어 주는 것이라면, 그것이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 좀 더 차원을 넓혀 영적인 나와 남은 구분 될 수 없다고 한다.


남의 아픔은 그대로 나의 아픔이고, 다른 한 사람의 성취는 나와 인류를 아울러 높이는 경사라는 것을 예수는 산상설교를 비롯한 가르침과 교훈, 육신을 초월한 삶과 죽음을 통하여 보여 주셨다. 예수가 거론한 ‘사랑’을 유행가처럼 불러대는 우리는 다시 예수의 사랑을 공부해 봐야겠다.

오른쪽 뺨을 때린 사람에게 왼쪽 뺨을 들이댐으로써 원한과 증오의 뿌리를 애초에 뽑아 버리는 사랑, 인종적 구분이나 기존 관념을 초월하여 다른 한 인간을 인류애로 볼 수 있고, 또 원수나라의 병객을 구제하기 위해 자기의 귀한 재산을 아낌없이 썼던 천대받던 나라 사마리아 사람의 숭고한 사랑, 오른쪽 손의 선행을 외쪽 손에게 알리지 않는 조건부 없는 사랑, 원수를 사랑 할 수 있는 해탈의 사랑, 천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하신 예수의 만인에 대한 사랑, 이러한 사랑을 오늘날 자칭 기독교 신자들이 외면하며 살고 있지는 않는가.

옆집에서, 옆 동네서, 가난과 좌절, 인종차별과 무지로 인해, 범죄와 살생이 연달아 일어나는데 나는 행복하고 안일하니까, 그런 거 모른다 하는 이들이 과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일까? 예수는 핍박과 천대와 가난으로 억눌린 이들의 친구였고, 불의와 부당한 율법자들을 과감하게 물리치고 일어서 그 결과 반란죄로 십자가위에서 참형을 당한 혁명가였다.

불공평한 대우나 차별을 감수하며 사는 사람들은 은근한 분노를 참고 누르며 산다. 그들의 분노는 살아있는 화산과 같다. 이런 환경 속에서 불법과 범죄, 부정의와 참사가 계속 일어나는데, 오직 선택 받은 나와 내 식구는 복된 인생을 계속하며 이웃의 비극을 외면해야 되나? 이것은 예수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사회에서 지금 젊은이들과 ‘조지 소로스’ 같은 재벌은 사회의 의식적, 도의적 변화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변화 운동은 많은 용기와 개인적 희생과 핍박을 각오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 정신적 개혁의 역사가 오늘의 위대한 미국을 분만했으며, 강대국 미국은 과거 로마의 운명을 걷지 않을 것이다. 마음의 집 주변에 쇠 울타리와 철문에 빗장을 굳게 지르고 사는 삶에서 진정한 보람이나 오래가는 충족감, 삶의 환희 같은 것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까.
카토나 추장의 영토에 살고 있는 장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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