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생의 졸업장

2014-05-31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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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비가 하늘이 뚫린 듯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일기예보로는 폭우가 온다는 기상대의 보도였다. “어쩌면 하필 이 좋은 날 비가 이렇게 쏟아질까!” 야외에서 행해지는 졸업식에 참석한 한 학생의 어머니는 하늘을 보며 원망이라도 할 듯하다. 허나, 정작 졸업식에 참석한 학생들에게선 조금도 불만의 모습을 찾을 길 없다.

그들의 눈망울엔 총기와 빛이 넘친다. 졸업한다는 감격과 기쁨에 넘쳐 비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것도 아랑곳 않는다. 싱글 벙글, 좋단다. 4년 혹은 6년, 각고의 힘든 과정을 넘어서서 받아드는 졸업장. 얼마나 대단한 것이랴. 졸업생을 축하하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가족들. 쏟아지는 비바람 속에서도 웃음꽃이 만발하다.


2013년 6월 둘째 딸 석사학위 졸업식에 참석하려 보스턴을 방문했을 때의 정경이다. 졸업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졸업(卒業)자체는 학업을 마치는, 과업을 종결하는 그래쥬에이션(Graduation)이지만 졸업식은 코멘스먼트 세리머니(Commencement Ceremony)라 한다. 코멘스먼트의 뜻은 ‘시작, 출발’의 의미를 담고 있다.

대나무를 보면 매듭이 있다. 한 매듭, 한 매듭 사이엔 대나무가 자란 과정이 담겨 있다. 졸업은 대나무의 매듭과 같다. 매듭이 지어지는 순간 다시 다른 매듭으로 이어진다. 끝과 시작이 동시에 일어난다. 학교를 마치고 사회로 들어가는 졸업생도 마찬가지다. 학업의 매듭을 짓고 다시 사회라는 매듭으로 들어가는 거다.

졸업은 젊은 사람들만의 축제는 아니다. 노년에도 자신의 꿈을 이루려 대학에 들어가 하고 싶은 공부를 계속하는 사람도 있다. 기회는 잡는 자에게 돌아오는 것. 지난 5월17일 조지 메이슨대학에선 79세의 미아 노턴 한인 할머니가 학사모를 썼다. 한국에서 미육군사병으로 복무하던 남편을 따라 미국에 들어온 건 39세 때였다.

할머니는 “80세에 학위를 받으려 했는데 일년을 앞당겼다”며 활짝 웃었다.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있는 이 대학 역사상 최고령의 졸업자가 된 할머니. 커뮤니티칼리지에서 준학사 학위(2006년)를 받고 편입한 후 대학에서 8년간 공부를 했다. 전공은 연극이나 미국역사도 수강했다. 할머니의 꿈은 음악학위를 또 받는 거다.

미국에 올 당시 단 한 마디의 영어도 못 했던 할머니는 두 자녀를 키워낸 후 자신의 학업을 위해 북클럽에 다녔다. 또 화원에 취직하여 나중엔 화원의 주인이 됐고 20년을 운영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나는 행복하기를 원했고, 학교에 계속 다닌다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손자뻘 되는 학생들과 졸업사진을 같이 찍었다.

졸업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1967년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졸업’(The Graduate)이다. 챨스 웨브의 소설을 마이크 니콜스가 감독한 것으로 주제는 사랑이다. 더스틴을 스타로 만든 이 영화는 더 인기를 끈 게 주제곡이다. 사이먼과 가펑클이 부른 ‘침묵의 소리(Sound of Silence)외 2개의 주제곡은 지금도 애청되고 있다.

졸업식에선 졸업장을 준다. 졸업증명서라고도 하는 이 증서는 수여하는 대학교와 대학이 소속돼 있는 주가 명시돼 있고 총장의 서명이 들어가 있다. 우리네 인생에게 주는 최종의 졸업장은 무엇이며 또 누가 졸업장을 주게 될까. 사망진단서가 인생 제일 끝의 졸업장이 되고 수여자는 사망진단서를 끊는 의사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은 육체의 끝을 알리는 졸업장이지 한 사람, 인생의 삶을 대변해 주는 졸업장은 아니다. 아마도 남아 있는 아내나 남편, 그리고 자식들을 포함한 가족과 친지와 친구들이 평하는 무언의 졸업장이 한 인생의 졸업장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세상이 안겨주는 공과(功過)의 졸업장이 마지막 학위가 될 듯싶다.

폭우 속에서도 웃음꽃 만발의 졸업식장. 인고의 결실이다. 코멘스먼트. 졸업은 대나무의 마디처럼 끝과 처음의 이음새다. 79세의 나이에 학사모 쓰고 또 학위를 받으려 하는 미아 노턴 할머니의 꿈. ‘침묵의 소리’를 연상케 하는 더스틴 호프만의 졸업영화. 인생의 졸업장은 하늘이 주는 것, 생의 공과가 마지막 학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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