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뿌리가 썩지 않으면 잎이 핀다

2013-08-2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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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아파트 길가 가로수 한 그루가 지난 번 샌디 폭풍으로 꺾여 버렸다. 뿌리에서 약 2미터 가량의 기둥 외엔 모든 가지가 다 날아가 버리고 앙상하게 나무 기둥만 서 있었다. 나무 기둥을 지나칠 때마다 보기 싫은, 죽은 나무를 캐내지 않고 왜 내버려 두나 하며 의아해했다. 송두리째 나무를 뽑아 버리면 될 텐데 돈이 들어서 그런가보다 하고.

샌디가 지난 가을에 왔으니 한 겨울이 지나고 봄도 지나 여름이 왔다. 나무기둥은 흉물단지처럼 늘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찡그리게 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썩은 송장 같은 나무 둥지 꼭대기에서 조그맣게 잎이 나기 시작했다. 작은 잎이 한 잎 두 잎 피기 시작하더니 가지를 치는 게 아닌가. 도대체 어디서 이런 기적이 일어나나.


지금은 가지가 많이 생겨나고 잎이 무성하다. 나무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 할 것 같다. 죽었던 나무가 다시 살아났으니 그렇지 않겠는가. 아마도 나무는 뿌리가 썩지 않고 온전했기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싶다. 뿌리가 썩으면 가지도 썩는데 뿌리가 썩지 않는 한 언젠가는 잎이 핌을 본다.

나무의 뿌리를 마음과 정신 그리고 영혼의 세계와 비교해 본다. 뿌리가 건강하게 살아 있는 한, 나무가 죽지 않고 잎을 피우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마음과 정신이 온전하고 영혼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뿌리가 건강하고 든든한 사람에 비유할 수 있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시들시들 말라 비틀어져가는 나무와 비유될 수 있다.

산에서 늘 보는 광경이 있다. 큰 나무들이 폭풍에 뿌리째 뽑혀 황량하게 쓰러져 있는 모습들이다. 하나같은 현상은, 쓰러진 나무의 큰 뿌리와 잔뿌리들이 깊이 뻗어있지를 못하고 모두 옆으로 퍼져 뻗어 있다는 사실이다. 놀라운 건 뿌리가 뽑힌 그 웅덩이엔 큰 바위나 돌들이 널려 있어서 뿌리를 땅 속으로 깊이 뻗지 못하게 막고 있다는 현상이다.

영혼과 정신이 맑은 사람,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은 역경이 오거나 폭풍 같은 시련이 닥쳐와도 그리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뿌리 깊은 나무처럼 영혼의 뿌리, 정신의 뿌리, 마음의 뿌리가 흔들리지 않게 깊이 옥토에 심겨진 나무 같은 사람이기에 그렇다. 물론 나무기둥과 가지들은 요동한다. 허나 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럼 어떤 사람이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사람일까. 무심(無心)과 중도(中道)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무심이란 마음 없음이 아니고 욕심 없음을 나타내는 마음의 현상이라 할 수 있겠다. 산 속의 작은 암자에서 평생 홀로 살며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보여 준 법정스님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사람 아닐까.

또 어떤 사람이 영혼이 맑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며 악이 소동치는 이 세상에서 평화스런 마음을 갖고 살아가게 해주는 암투병중에도 희망을 노래하는 이해인 수녀 같은 사람이 아닐까. 2010년, 암의 고통가운데서도 출간한『희망은 깨어있네』란 책. 제목 자체가 희망으로 다가온다.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두 아들을 처형하여 죽인 범인을 용서하여 자신의 양자로 삼고 소록도 나병환자 수용소에서 그들의 손발이 되어 주던 손양원목사. 교장으로 초청을 받았으나 나환자들의 돌봄을 마다할 수 없다고 거절한 목사. 그도 6.25의 희생으로 순교(42세)한 목사. 이런 사람이 영혼이 깊고 맑은, 뿌리 깊은 나무 같은 사람이 아닐까.

이런 뿌리 깊은 사람들이 있음에 세상은 밝아진다. 세상엔 사랑과 자비의 잎이 핀다. 용서와 화해의 잎이 핀다. 한 겨울 눈서리 안에서도 꽃을 피우는 설중매 같은 아름다움이 피어난다. 그들의 뿌리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깊이 뿌리내려 세상을 욕심 없이, 용서함과 희망으로 살아가게 만든다. 뿌리에서 뿌리로 보이지 않게 깊이 뻗어나간다.

부러져 버린 가로수 한 그루의 생명이 뿌리의 힘으로 다시 살아나 잎을 무성히 피우며 소망을 안겨주고 있다. 영혼과 정신, 마음이 깨끗하고 맑은 사람은 뿌리가 깊어 역경이 와도 이겨나갈 사람들이다. 법정스님, 이해인수녀, 손양원목사와 같은 무소유, 희망, 사랑의 뿌리가 지금도 세상을 밝게 해준다. 뿌리가 썩지 않으면 언젠가 잎이 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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