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뜻이 있는 그림

2013-07-2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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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 순 태 <카라미션 운영위원장>

16세기에 네덜란드에서 활동한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hel de Oude)이라는 이름의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주로 사회의 하층계급 인물과 삶을 그려내어서 세계 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화가였습니다.

그가 살던 당시는 교권의 전성시대였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화가들이 성모 마리아와 예수의 생애를 그리거나 사회 지배계층이던 귀족들과 사제들을 그렸습니다. 그 시대의 성화를 보면 예수께서 살아계시던 때에는 감히 구경도 못했던 값비싼 옷을 16세기 화가들은 성모와 성자에게 입혔습니다. 그래야 그림이 팔리고 화가는 대접을 받고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회적인 분위기에서 브뤼헐은 거지와 농민들, 하류계급의 삶을 그렸습니다. 건초 만들기, 거지들, 농민들의 춤, 장님을 이끄는 장님 등 작품 이름만 들어도 그의 그림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짐작하게 됩니다. 그것은 시대조류를 거슬러가는 행위였습니다.


그의 뛰어난 화법과 황금빛 색상이 무척이나 정교하고 아름답지만 그런 실력으로 당시 잊혀진 존재였던 거지나 농민들의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시퍼런 권력의 교권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위험한 행위였고, 지배계층의 관심과 구매 욕구와는 거리가 먼 예술생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바라보는 그림, 상품으로서의 그림이 아니라, 소외받는 계층에도 소중한 삶이 있다고 항변하고 증언하는 그림으로 뮤지엄에서나 보존하는 작품이었고, 역설적이게도 그런 이유로 그의 미술은 미술사에 살아남았습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뉴욕의 인물화 대가들 그룹에서 활동하는 헤리 안(한국명 안승윤)이라는 화가가 생각납니다. 이 분의 그림이 대부분 거지나 노점상인, 혹은 헤어진 구두짝 등입니다. 그래서 그의 뛰어난 묘사력과 아름다운 색상의 그림은 갤러리에서 팔리지 않습니다. 다 헤어지고 떨어진 구두짝, 남루한 거지 노인이 그려진 그림을 사서 벽에 걸어두고 감상할 사람이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해리 안의 작품은 그의 개성을 알아보는 뮤지엄에서나 겨우 구매하여 주는 그림이 되고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돈이 되는 그림을 그리라는 핀잔 성격의 권유도 많지만 그는 이런 그림을 계속 고집하여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헌 구두짝에서 일회용 소비사회의 비정한 망각과 훼손된 윤리를 보았습니다.

그는 이런 오늘의 풍조에서 사람의 관계마저 필요하면 쓸개라도 빼어줄 듯이 아첨하고, 효용가치가 없어지면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또는 헌신짝처럼 버리고 돌아서는 인간관계의 불행을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버려진 구두짝을 정성스럽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한 때 그 주인의 체중을 받쳐주고 그 발을 보호하여 주다가 낡았다는 이유로 무참히 버림받은 구두를 헤리 안은 작품으로 재탄생시켜 우리에게 되돌려 줍니다. 우리는 낡은 구두짝 작품을 바라보면서 무심코 버렸던 것에 대한 연민의 시선을 갖도록 요구받습니다. 그리고 그 자각을 통하여 우리의 삶을 받쳐주는 사물들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인간 가족의 소중성을 깨닫습니다.

요즘 전 대통령 전두환씨가 300점이 넘는 그림을 은닉재산으로 보관하고 있다가 사법당국에 압류되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소위 값나가는 그림들이 돈세탁의 수단으로 전락한 서글픈 현장을 보았고, 그 미술품들이 예술로서의 가치가 아닌 은닉재산의 가치로 도착된 현실을 보았습니다.

16세기의 가난한 사람들도 한 인간의 삶으로 예술의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그림으로 항변한 브뤼헐의 정신과, 21세기 오늘날 도를 넘는 소비사회의 위험과 비정성을 그려내고 있는 헤리 안의 작품정신이, 전두환씨 일가의 전방위 치부수단 앞에서 무색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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