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리버풀 대학에서 물리학을 가르치던 폴란드 출신 과학자가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핵폭탄 개발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며 처음에는 망설이다가, 그 무기가 독일 견제용으로 사용될 것으로 믿고 수락했다. 그러나 나중에 원자폭탄이 연합국인 소련 견제용으로 개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곤 프로젝트에서 손을 떼고 1944년 리버풀로 돌아갔다.
2차 세계대전 후, 영국 시민이 된 그는 반핵운동에 앞장서서 핵에너지의 평화적 사용 캠페인을 벌이고, 핵의학 분야에 공헌했다. 1955년에 그는 아인스타인을 비롯한 동료 과학자들과 함께 ‘핵무기는 인류의 적’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50주년을 맞은 1995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은 그가 바로 조세프 로트블라트다.
로트블라트가 회고한 ‘자신의 길’은 고대 그리스의 ‘정의(dikaios)’개념과 유사하다. 예를 들면 트로이 전쟁에 나간 남편(오디세우스)이 돌아올 때까지 20년 동안 정절을 지키다가 재회하는 부인(페넬로페)의 신화에서 볼 수 있다. 수없이 쏟아지는 청혼 유혹에 부인은“내가 짜고 있는 베가 완성될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며 낮에는 베를 짜고 밤에는 그것을 다시 푸는 전략으로 버텼다.
자신의 남편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지를 설명할 때, 부인은 그가 엄한지, 잔인한지, 다정한지를 묘사하기보다 “그는 자신의 길(dikaios)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다”라고 간략하게 말했다. 한편 플라톤의 ‘국가’에서는, 정의라는 단어를 군주에게 적용할 때 “간섭하거나, 끼어들거나, 방해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dikaios)을 가는 지도자”라고 표현했다.
본래 ‘정의’란 윤리, 도덕적인 올바른 행동이라는 뜻보다 자신의 위치ㆍ신분ㆍ소속을 깨달아 그것에 걸맞게 행동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음악에 관심도 없는 학생에게 피아노를 치라고 강요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위다. 수업능력도 없는 학생에게 “우리는 제군같 은 인재가 필요하다”며 지원을 부추기는 대학도 정의에서 멀다.
라면을 잘못 끓여왔다고 잡지책으로 승무원의 얼굴을 때린 것은, 고도에 따라 끓는 속도가 다른 라면의 특성을 모독함과 동시에 잡지책의 용도를 왜곡하는 정의스럽지 못한 짓의 극치다. 자기 손의 위치와 소속이 어딘지 몰라 남의 엉덩이에 허락 없이 ‘파킹’한 것도 마찬가지다.
핵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비록 정의롭지 못한 행동을 했었지만, 로트블라트는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길로 돌아와 사회에 남다른 공헌을 남겼다. 강요ㆍ무작위 마케팅ㆍ손찌검ㆍ못된 손버릇으로 정의롭지 못한 모두에게도 자신의 길로 돌아갈 기회는 있다. 부모는 학생으로 하여금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찾아 나서게 하고, 대학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학생들에게만 선전물을 뿌리고, 상무는 어디에서나 개인의 기호에 알맞게 끓여지는 즉석라면을 개발하고, 대변인은 파킹장을 찾아 헤매는 무수한 손들을 가이드하는 앱을 만들면 어떨까.
아니면 회계 부정으로 이미지가 땅에 떨어지자 회사 이름을 앤더슨 컨설팅에서 액센츄어로 바꾸고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세컨드 챈스에서 살아남은 사례를 통해, 자신이 패자 부활전에서 어떻게 회생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도 자신의 길을 지켜야 할 것이다. 라면 물을 얹고 지켜보고 있으면 “왜 이리 빨리 끓지 않는 거야”라는 조바심이 난다. 세컨드 챈스를 찾아가는 이들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독촉하는 것은 그들의 길을 훼방하는 것이다. 조바심을 내기보다, 로트블라트의 업적이 노벨상을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받기까지 5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