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날의 일기

2013-04-04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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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혜숙 화 가

이 꽃과 나비<사진>를 그린 그이는 누구였을까. 이토록 아름답고 유별난 소박함으로 정감이 넘치는 꽃과 파리와 나비들과 초록 사마귀가 함께 노는 봄날을 그린 그는 누구였을까.

100년 전쯤이었을 거야. 그는 가난했겠지. 봄이면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며 아리따운 꽃과 나무를 그려 새 봄을 맞으며 집안을 단장하는 여인들을 기쁘게 했겠지. 그는 알고 있었을 거야. 이토록 화려하고 유연하고 소박한 꽃을 그릴 줄 알았던 그는 시절의 무상함을. 타오르는 아름다움, 꽃들과 나무, 하늘과 구름, 산천과 개울, 냇가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생동하고 피어오르며 또한 재빨리 사라지는 것을 따뜻한 마음으로 바라보곤 했겠지.

이름도 남기지 않은 그이는 알까. 그 땅에서 태어난 후손이 멀리 이국으로 흘러와 봄 햇살 나른한 오후, 한참씩 그가 그린 그림의 선과 색에 감탄하며 눈여겨보고 또 들여다보는 이 시절을, 그가 죽은 몇백년 후에.


어느 시절이었을까 그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누구를 위해 그렸을까.

사라지고 싶어라. 창밖 대나무 울창한 나무 잎새에 이는 바람을 바라보며 문득 실종을 꿈꾸는 여인을 알까. 모를 거야 그는. 어느 혼령이 되어 흩어져 버렸을 거야. 그렇게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니. 그림 한 장에 온 마음을 담아놓고 그는 사라졌다.

마음은 왜 있는 것일까. 왜 태어난 것일까. 향유하기 위하여? 이제 더 이상 무엇을 향유할 것인가. 자꾸 배고파지는 위장에 들어가는 야채주스와 밥과 그런 것들을 향유하고 옛 애인이 보내준 테입에서 돌아가는, 이제는 그도 돌아가고 없는 죽은 가수의 ‘매일 매일이 밸런타인스 데이’(Each day is Valentine’s Day)라는 아주 부드럽고 낮고 다정한 남자의 목소리를 향유하고, ‘나는 너무 쉽게 사랑에 빠져’(I fall in love too easily)라고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를 거실과 침대에 흐르게 하고 새벽 바다를 연상시킨다는 그의 트럼펫 소리를 향유하고 그리고 나는 또 무엇을 향유할 수 있는가.

나는 어디에 갇혀서 저 새들처럼 훨훨 마음이 날고, 나와 이 세계가 다름이 없는 일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인가. 외로움이 자기 연민에 불과한 천박한 생각이라는 것을 자명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문득 외로워져서 어머니를 뵈러 고국에 갔다. 겨울 내내 흰 눈이 내려가는 곳마다 장관이었다.

엄마 곁은 봄날보다도 따뜻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랄 것 없는 몸과 마음이 충족한 상태가 지속되며 LA의 거리와 날씨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엄마 곁에서 느끼는 편안함은 마치 엄마 뱃속의 태아처럼 세상살이의 모든 문제로부터 벗어난 듯한 고요한 충만함이었는데 웬일인지 그림을 그리고자하는 내적 필요와 열망조차 사라진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왔다.

세상을 향해 떨리는 손을 내밀고 세상 속에서 서 보려하고 세상과 나의 예술을 나누고자 하며 일어나는 끝없는 의심과 회의가 그림 그리게 하는 충동을 불러일으키고 37년을 살아온 LA가 나의 고향이고 외지의 외로움과 불안이 창조의 원천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돌아온 LA에서, 사막에 가서 며칠 밤을 잤다. 온 누리에 내리는 캘리포니아의 햇살과 바람, 쭉쭉 뻗치는 사막의 탁 트인 대지의 기에 가슴이 열린다. 가는 곳마다 4월의 백합이 부활을 노래하는 봄, ‘이제 다시 시작이다’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치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깨어나, 거리에 핀 봄꽃들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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