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렌지 상자와 함께하는 2026년

2026-01-08 (목) 12:00:00 이상희 UC 리버사이드 교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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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1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한국에 계시던 부모님께서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셨다. 시도 때도 없이 펑펑 울면서 정신없이 장례를 치렀다. 상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옆에서 시키는 대로 했다. 옆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던 이들이 누구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이 치러야 하는 큰 의례인 관혼상제 중 가장 무거운 상을 지내고 한숨 돌리던 내게 닥친 큰 일은 ‘집 정리’였다. 부모님이 사시다가 돌아가신 그 집, 내가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그 집은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우리 가족의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미국의 일상으로 돌아와야 하는 현실은 내게 사흘의 말미를 주었다. 그동안 물건들을 처분해야 했다. 버릴 것, 남에게 줄 것, 그리고 미국으로 가지고 올 것으로 나누었다.

슬픔으로 어쩔 줄 모르던 나는 제대로 버리지도, 제대로 주지도, 제대로 가지고 오지도 못했다. 낡아서 제대로 쓸 수도 없는 무거운 가구를 부모님의 손때가 묻었다는 이유로 비싼 국제 운송료를 물고 바리바리 가지고 왔다. 반면 어린 시절 티브이 옆에 항상 있었던 달항아리는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이유는 분명하다. 나는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부모님을 떠나보낼 준비도, 부모님의 물건들을 정리할 준비도 하지 못했다.

부모님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분은 생전에, 물건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지켰다. “우리가 떠나면 아무 미련 가지지 말고, 모두 다 내다 버려라.” 이 간단한 명령은 언뜻 쿨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막상 부모님의 집을 정리하는 내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침이었다. 나는 도저히, 차마 모두 다 내다 버릴 수 없었다. 물건 하나하나에 어릴 적의 추억이 배어있었다. 하지만 첫날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서 둘째 날부터는 물건을 제대로 구분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시간에 쫓겨 다음 날부터는 대충 싸고, 대충 버리고, 대충 남에게 주고, 대충 미국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그 ‘대충’의 대가는 컸다. 미국 집에 도착한 이삿짐 박스를 풀면서 나는 후회했다. 그리고 단단히 결심했다. 절대로 내 딸아이는 이런 괴로운 짐을 지게 하지 않으리라.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남길지에 대한 결정은 내가 온전한 정신일 때 해 놓아야겠다고 말이다.

병오년에 태어난 내가 마침 2026년 병오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기념으로 짐을 버리고 가벼워지기로 하고 SNS에도 그렇게 올렸다. “2026년에는 가벼워지기.” 그렇지만 “가벼워지기”는 좋은 목표가 아니다. 좋은 목표는 원하는 변화를 실제로 가져오는 목표다. “가벼워지기”는 애매모호하고 추상적이다.

목표는 SMART 해야 한다. SMART 한 목표란, 구체적이고(Specific), 계량적이고(Measurable), 행동으로 옮길 수 있고(Actionable), 관련있고(Relevant), 시한이 있는(Time-bound) 목표다. 목표가 SMART 하지 않으면 작심삼일이 되기 쉽고 변화를 불러오기 힘들다.

학창 시절에는 방학이 가까워질 즈음이면 생활 계획표를 짜서 내는 숙제가 으레 주어졌다. 둥근 원을 그리고 채워 넣은 일과는 언제나 완벽했다. 오전 6시에 기상, 세수, 양치질, 아침 식사, 오전 공부, 피아노, 12시 점심 식사, 휴식, 오후 공부, 독서, 오후 6시 저녁 식사, 저녁 9시 취침. 구체적이고 계량적이며 시한이 있는 목표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목표였다.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아침 6시에 일어날 수 없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방학 동안 단 하루도 내가 그려낸 생활 계획표대로 지낸 적이 없다.

이번 2026년 ‘가벼워지기’ 목표를 SMART 하게 만들었다. 얼마나 가벼워질까? 일단 별 이유없이 그저 “언젠가 쓸 날이 오겠지.” 싶어서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없애기로 했다. 그렇다고 “매달 방 하나 비우기”는 너무 거창하다. 마침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오렌지 상자가 눈에 띄었다. 나는 “매주 오렌지 상자 하나 분량의 물건을 비우기”로 목표를 정했다. 그리고 SNS에 인증샷을 올릴 계획이다.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새로운 주인을 찾아간다.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는 물건들은 BuyNothing.org 에 올려서 처분하기로 했다. 한국의 당근마켓과 비슷하다.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누군가 ‘저요!’라고 손을 들면 현관 앞에 내놓으면 가져간다.

이번 주 오렌지 상자에는 사진 액자들을 넣는다.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공간이 비자 새로운 공기가 들어온다.

<이상희 UC 리버사이드 교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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