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 병

2012-10-2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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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올가을 단풍은 유난히 아름답다고 한다. 그런데도 스산한 가을이 되면 가을 병을 앓는 사람이 많다. 가을이 남자의 계절이라고 예부터 말들을 하지만 실상 남자들 보다 여인들이 더 많이 가을 병을 앓는다. 정서가 남자들보다 여인들 가슴속에 더 가득 차 있고 그 정서에 예민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다 커서 한사람씩 집을 떠난 후 가을이 오면 가을 병에 시름시름 앓는 여인들을 보면 아름답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고향이고 어머니들에게 있어서 아이들은 종교나 다름없다. 그런 아이들이 무슨 이유로든지 다 떠나고 머지않아 또 떠나면 아무리 날씨가 따뜻해도 때가 되면 노랗거나 붉은 색으로 옷을 갈아입는 나뭇잎새를 바라보며 아무런 까닭 없이 가을 병에 속마음을 태우는 어머니들, 올 가을에도 가을 병을 앓는 그런 여인들이 또 많을 것이다.

가을이 놀다가는 벌몬트주나 뉴욕 업스테이트의 7번 도로 좌우에 늘어선 가을은 유난히 아름답다. 아니, 아름다움이 지나쳐 마음이 시리도록 저민다. 여인들은 인류의 뿌리다. 그리고 남자들보다도 냄새를 잘 맡고, 촉감이 예민하고 맛에 뛰어난다. 남자들이 뒤떨어지는 이런 현상은 아이를 출생하고 키우면서 아이를 보호하는 모성으로서의 현상이다. 위험을 피해가고 어려운 일을 피해가면서 안전하고 아이들에게 득이 되는 쪽을 만나면 서슴없이 택하는 모성으로서의 지혜, 그 기본적인 지혜 속에서 우리 모두는 출생을 하고 성장을 했다.


솜 같기도 하고 어느 때에는 칼날 같기도 한 어머니들이라 좋은 일에 연습이 잘 되어 자라는 아이에게는 큰 위안이 되는 보금자리요, 그렇지 못한 아이에게는 마음을 베어가면서 훈도하는 엄한 선생님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머니들도 정서가 가득한 여인이라 가을이 되면 이일 저일 뒤돌아보며 가을 병을 앓게 된다.

아버지들처럼 자식들에 대한 고집보다도 자식들에 대한 이해가 앞서는 어머니들, 내 어머니가 그랬다. 서양의 심포니 소리보다도 아름답다고 여긴 내 어머니는 아무리 악을 쓰는 세상이라도 조용했다. 조용한 가운데에서 나오는 그 말은 두뇌에서 나오는 학문이 아니라 심성을 올바로 키우려는 심성의 학문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 어머니가 가을이 되면 멜로의 줄거리로 만든 영화를 보러 삼류극장엘 가끔 갔다 와서는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극장에서 눈물을 닦던 손수건을 빨고 있었다.

특히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가가 되는 것처럼 아이들이 성장을 해 집을 떠나 대학을 가거나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면 어머니 마음속에는 자식이라는 형체만 남아 있어 어머니들의 마음은 낙엽 진 가을 벌판이나 폐가가 되어 뻥 뚫린 하늘만큼이나 허전하다. 남아 있는 것은 뒤돌아보는 허망한 추억뿐이다.

많은 투자로 쌓았다가 꺼내보는 추억은 여인들로 하여금 가을 병을 앓게 한다. 그래서 어머니들의 눈에는 언제나 많은 피가 고여 있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이 사랑이라 여겼지만 사실은 소리 감춘 절규였음을 나이든 사람이면 시간이 많이 흘러 간 후 늦어서야 깨닫는다. 그리고 그리워한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어머니도 먼 하늘로 가고 자식들에게는 가슴 저린 추억으로 남는다. 그런 추억 한 조각을 등에 지고 그래도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가을 길을 걷는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고향에 지나지 않지만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들이 종교였다. 사랑이 종교의 근본인 것처럼 어머니란 사랑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나도 어머니가 그립다.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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