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부상투혼

2012-10-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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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야구의 지존을 가리는 월드 시리즈가 오는 25일 열릴 예정이다. 아메리칸 리그와 내셔널 리그의 승자가 격돌하는 월드 시리즈를 앞두고 야구 매니아의 열기가 뜨겁다.

최근 보스턴 레드 삭스 투수 커트 실링의 전설적인 ‘핏빛 양말(Bloody Socks)’이 경매에 나왔다. 이 양말은 커트 실링이 2004년 월드시리즈 우승시 신었던 것이다. 발목 인대 부상을 당했던 실링이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결정전 2차전에 선발투수로 나와 부진하자 의료진은 인대가 피칭에 나쁜 영향을 준 것으로 판단했다. 끊어진 발목의 인대를 수술을 통해 실로 꿰매 인대를 임시 봉합시켰는데 이 방법이 효과를 가져와 6차전에 등판한 실링은 7이닝 동안 단 2실점을 하는 활약을 하며 벼랑 끝에 몰렸던 팀을 구해냈다.


그해 레드삭스는 월드시리즈 우승팀이 되었고 실링은 86년만에 베이브 루스의 저주를 깨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때 발목에 피를 흘리며 열심히 경기를 하는 그의 모습은 많은 팬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월드 시리즈에 신고 등판했던 이 핏빛 양말은 보관돼 왔었다.
그는 2008년 은퇴 후 전 재산을 게임 벤처회사 설립에 투자했다가 빈털터리가 되었다. 결국 빚을 갚기 위해 핏빛 양말을 경매로 내놓았는데 전문가들은 그 양말이 2004년 월드시리즈 우승 직후 팔렸으면 더 많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야구 선수시절 통산 216승을 거두며 세 개의 우승반지를 가졌던 전설적인 투수 커트 실링, 발목 부분에 핏자국이 선명한 양말 사진을 보면서 그가 이 위기를 극복하기 바라는 마음 크다. 정말 힘들고 어렵겠지만 ‘야구는 끝까지 가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의 인생 후반전도 통쾌한 역전극이 일어나기 기대한다.

그리고, 배우 김명민이 마라토너로 나온 ‘페이스 메이커(Fase maker)란 한국영화가 있다. 불우한 집안사정으로 주눅 든 동생을 위해 달리기를 시작한 그는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위해 페이스 메이커가 된다. 페이스 메이커란 우승 후보의 페이스 조절을 위해 얼마동안 달려주는 역할이다.

평생 남을 위해 달려왔던 노장 마라톤 선수 주만호(김명민)는 마라톤 시합에서 금메달 유망선수를 30킬로미터까지 인도한 뒤 그만 달리려는 순간 우산을 쓴 동생을 발견한다. 어릴 때 약속처럼 우산을 펼치고 형에게 빨리 달리라는 신호를 본 순간 그는 다시 달리기 시작하고 다리는 또 말썽을 부린다. 그는 깃대로 허벅지를 찔러가며 감각을 되살리고 다리 위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가운데 완주의 기쁨을 누리고 관중들은 환호한다. 사람들은 피 흘리며 싸우는 이른바 부상투혼(負傷鬪魂)에 감동하는 것같다.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은 연습 중이나 경기 중에 부상을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몸이 다쳤어도 경기를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면 관중은 결과와 상관없이 감동부터 한다. 그리고 좋은 성적을 올리면 인간 승리라며 선수를 치켜세운다.

지난여름 런던 올림픽에도 한국 선수들은 이마가 찢어지고 오른쪽 눈이 시퍼렇게 멍들고 뼈에 금이 가고 다리가 삐어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평생 갖기 힘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부상투혼을 했다. 팀 전력과 국민의 염원, 조국의 메달 순위를 생각하면 중도 포기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피를 철철 흘리며 글로브를 휘두르고, 절뚝거리면서 달려가고 온몸에 고통스런 모습이 역력한데 굳이 이기려고 애쓰는 모습은 안쓰럽다. 우승을 놓쳤다고 분한 눈물을 쏟는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고 진정한 스포츠 정신이 뭔가 싶다.

저마다 관점이 다르겠지만 우승만이 최고가 아니지 않은가. 달리기를 하면 그저 좋고 활을 쏘면 가슴이 펑 뚫리는 것 같고, 경기에 임하면 투지가 살아나 승부근성을 은근히 즐기는 것, 그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부상투혼으로 무리하여 선수생활을 일찍 마감할 수도 있고 평생 불구가 될 지도 모를 무모함이 되지 않기 바란다. ‘진정한 프로는 자신의 몸을 먼저 돌보아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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