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의 기도

2012-10-1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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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 / 목사)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한다. 농사를 짓지 않더라도 땀의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계절은 흐뭇하고 마음의 풍요를 느끼게 한다. 인생에도 수확이 있다. 기쁨을 거두는 자도 있고 후회를 타작하는 인생도 있다. 영광을 수확하기도 하고 부끄러움을 거두어들이기도 한다. 인생 수확을 생각할 때 두 사람의 뉴요커가 머리에 떠오른다. 빌리 마틴과 재클린 오나시스이다.

뉴욕 양키즈 팀의 감독을 지낸 빌리 마틴(Billy Martin)의 전기가 나와 있다. 그가 잘 한 것은 야구 감독뿐이었다고 저자는 서슴치 않고 말한다. 부부생활도 실패, 아이들과도 사이가 나빴고, 알코올 중독에다가 좌충우돌 누구와도 싸우는데 어른의 체통도 없이 주먹질 싸움도 잦았다고 한다. 심판과 싸워 퇴장당하는 모습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았는가! 결국 세상을 빨리 하직하게 되었지만 유명한 인사치고 어쩐지 꺼림칙한 여음을 남긴 수확으로 치면 흉작 인생 같은 연민이 간다.


이런 사람에 비해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오나시스는 어떤가? 암과 싸우다가 64세로 마친 단명이었으나 언론들은 그녀를 ‘사랑받은 여인’이란 찬사를 붙였었다. 부호 오나시스와의 재혼 때도 미국인들은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뉴욕에서 아파트 생활을 할 때는 이웃의 많은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는 조용함과 겸손을 유지하고 따듯함과 품위를 보존하였기 때문이다.

남에게 그것도 공개적으로 사랑받는 사람이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것은 갑작스러운 선심이나 연기로 만들어지지 않고 평소에 품기는 겸손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자비한 마음은 영혼의 문을 열고 강퍅한 마음은 이웃의 문을 닫는다. 대개 똑똑하다는 사람이 모가 나기 쉬운데 재클린은 젊어서부터 남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잘 받아들이는 아량이 있었다고 한다. 뉴스 메이커였던 두 유명인의 대조적인 인생 수확이다.

나는 단풍을 바라볼 때 숭고한 순교자의 모습을 생각한다. 여름 내내 무성한 녹색으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던 잎사귀들이 마지막으로 한 본 화끈하게 자신을 불태우고 떨어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낙엽은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어 죽어서도 봉사한다. 나는 어려서 연필을 깎을 때 측은한 마음을 품어본 일이 있다. 요즘은 기계로 깎으니까 생각할 겨를도 없지만 옛날에는 칼로 연필을 깎았다. 연필대는 연약한 심을 보호하고 있다가 자기의 몸이 야금야금 깎여 내려가며 사명을 다하는 모습이 얼마나 갸륵한가! 몽당연필은 희생과 아픔을 통과해 온 개선장군과 같다.

‘풀루타크(Plutarch)영웅전’은 단순히 로마 그리스 시대의 영웅 열전이 아니라 영웅의 진화를 말해 준다. 고대 영웅은 신에 가깝거나 야수와 인간이 합쳐진 반인반수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흐를수록 영웅의 이미지는 보통사람에 가까워진다. 미국의 영웅들은 ‘보룬티어(무보수 봉사자)’들이란 말이 있다. 한 구석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자들이 진짜 인생의 수확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단풍을 바라보며 이런 기도를 적어 보았다.
“우리에게 오늘도 생명 주심을 감사합니다/ 덤으로 하루씩 은혜로 하루씩/ 보태주시는 이 목숨/ 감사함으로 유익하게 사용하게 하소서/ 나를 믿어주는 이 있으니 더 진실하고/ 나에게 기대하는 이 있으니 더 부지런하고/ 나를 사랑해 주는 이 있으니 더 겸손하고/ 나를 걱정해 주는 이를 실망시키지 않는/ 오늘, 결실의 하루가 되게 하소서/ 팔 다리 성할 때 힘껏 사랑하고/ 기회가 주어지는 동안 긍휼을 뿌리어/ 나의 짧은 인생이 떫음을 남기지 않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여음이 되게 하소서/ 높은 가을 하늘처럼 보다 높이 바라보고/ 붉은 단풍처럼 열정적으로 불태우는/ 멋진 시간 후회 없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오곡백과 거두어들이는 이 때/ 사랑의 열매 적음을 뉘우치오며/ 오늘도 덤으로 주신 생명 소중히 쓰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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