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바닷가 소년의 꿈

2012-10-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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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매년 10월 두번째 월요일(오는 8일)은 컬럼버스 데이로 이태리 제노바 태생 크리스토퍼 컬럼버스(1451~1506)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기리는 날이다. 그는 네 번이나 항해를 하면서도 ‘서인도제도’인줄 알았으나 얼마 후 피렌체 태생의 모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대륙임을 밝혔고 이후 그의 이름을 따서 ‘아메리카’라고 불려진 이야기를 누구나 알 것이다.

미국 탄생의 기반이 된 컬럼버스의 생가가 이태리 북서쪽 제노바에 있다. 작년 가을에 북부 이태리 지방을 여행하면서 밀라노에서 기차를 타고 한시간반을 달려 제노바의 컬럼버스 생가에 간 적이 있다.기차역에서 탄 택시는 좁고 가파른 언덕, 낡은 유적지를 지나 10여분 만에 복잡한 도로변을 살짝 비켜서 담쟁이넝쿨이 내려오는 아담한 2층 석조건물 앞에 도착했다. 원래의 터 자리에 고향사람들이 미국대륙을 발견한 컬럼버스를 자랑스레 여겨 지어놓은 곳이라고 했다.

좁은 집안에는 컬럼버스가 신대륙을 탐험할 때 가져간 식물과 과일 조형물, 기구들이 보존된 유리장과 당시 직물가게에서 장사하던 부모의 모습을 그린 그림, 컬럼버스 인형, 상반신 석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생가 주위는 별로 정돈되어 있지 않았고 사람들로 복잡했지만 그 앞에 있는 제노바 타워는 올라가 볼만 했다. 가파른 계단을 돌고 돌아 옥상에 올라가니 타워 밑으로 제노바 시내 전경이 다 보였고 13세기와 14세기에 피사, 베네치아와 자웅을 겨루던 해운왕국 제노바 강국의 자존심답게 타워는 아직도 굳건했다.


사방팔방이 뚫린 옥상에서 바람에 휘날리는 깃발을 보면서 역시 바람이 세구나 했고 이 바람을 맞으면서 큰 바닷가 소년의 꿈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바닷가 마을에는 그날도 머리카락이 눈앞을 가릴 정도로 심한 바람이 불었고 뜨거운 햇살은 소년의 피와 살이 되고 자양분이 되어 ‘도시로 가리라, 지중해를 건너 중국에 가고 인도로 가리라’는 도전과 용기를 북돋워주고 꿈을 여물게 했을 것이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난 컬럼버스가 고향 앞바다에서 뱃고동 울리는 대형 상선들을 바라보면서 소년기를 보내고 당시 최대강국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이 있는 궁으로 가서 신천지의 꿈을 설득시키고, 드디어 재정적 후원을 받아 서해항로로 가는 꿈의 실현이 한눈에 그려졌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수평선 너머 바다가 끝나는 곳에서 벼랑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던 그 시절, 컬럼버스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신대륙을 찾아갔던 그 담대한 용기에 끈적거리는 해풍을 견뎌낸 소년의 원대한 꿈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노바 프린치페 기차역에는 엄청난 높이와 크기의 컬럼버스 석상이 서있어 사람들은 고개를 한껏 뒤로 제끼고 올려다보아야 한다.한 바닷가 소년의 꿈이 무르익어 신대륙을 발견했고 이후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고 오늘날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한인들도 전미주에 200만명 이상이 이민 와 살고 있다. 물론 컬럼버스가 신대륙에 발을 디디면서 아메리카 인디언의 비극이 시작되었기도 하다. 북미, 중미, 남미 인디언들은 약한 면역 체계로 인해 컬럼버스 일행이 싣고 온 이국의 풍물 바이러스에 의해 대다수 사망했고 학살됐고 백인들이 주인이 되었다.

컬럼버스에 대한 공과(功過)의 논란을 떠나 그의 어마어마한 꿈을 이루게 한 꿈의 뿌리가 잉태된 도시라는 점에서 제노바는 고풍스럽고 경이로웠다.한 바닷가 소년이 꿈을 꾸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떤 곳에 살고 있을까? 물론 그가 아니더라도 훗날 누군가에게 신대륙은 발견되었겠지만 그가 첫 발자욱을 이곳에 디뎠다.

사람들은 젊어서는 다들 꿈을 꾸지만 나이가 들면서 삶과 적당히 타협하며 점차 “내꿈이 뭐였더라?” 하게 되고 “꿈, 그런 게 있었나?”, “그냥 오늘도 무사히 살면 되지 뭐” 하게 된다. 컬럼버스만큼 위대한 포부는 아니더라도 오늘부터 소박한 꿈이라고 꾸어보자. 아예 꿈조차 없다면 어째 좀 서글프다. 또 꿈은 이뤄지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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