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긴 긴 여름날의 어머니 꿈은 어디로

2012-09-2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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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참으로 더운 여름이었다. 기상변화 때문이었을까? 같은 여름의 같은 온도인데도 어떤 사람은 덜 덥고 어떤 사람은 더 덥게 이 여름을 넘긴다. 같은 일을 하는 데에도 어떤 사람은 가볍게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힘들게 일을 한다. 겉으로 보이지 않는 속사정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가 비슷비슷 하게 사는 것 같지만 사람 사는 일에 속사정은 모두가 다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삶이 즐겁고 어떤 사람은 삶이 원망스럽다.

내가 아는 글 잘 쓰는 한 여교사가 학교로 다시 돌아갔다. 이번 학기에는 좀 쉬어야겠다고 하더니 교장선생님의 배려와 권유로 귀엽기 짝이 없는 저학년을 맡아 가벼워진 마음으로 학교로 돌아갔다. 쉬어야겠다고 푸념하던 무거웠던 때와는 달리 두 딸을 둔 그의 마음이 가볍게 된 것이다. 멋을 깊이 아는 여자인데도 별로 화장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멋있어 보인다. 공부를 많이 하면서 배어난 지성이 온몸에 배인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여자란 성장을 하면서 거의 20대가 되면 얼굴에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30데에는 본연을 감추는 가장을 하고, 40대에는 꿈에 젖어 헤매던 이상형을 따라 변장을 하고, 50대에는 불만에 환장을 하고, 60대에는 없는 것도 있는 듯, 이루지 못한 것도 이룬 듯 위안삼아 포장을 하고 70대에 가서는 만사를 포기하고 파장을 하고, 80을 넘으면 또 다른 화장으로 영원히 갈 길을 간다.
미국에서는 자기의 본래 성씨마저 남편의 성씨 따라 성을 갈고 살아도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다 잊고 산다. 노새보다도 일을 많이 하며 사는 어머니들의 무덥던 긴긴 여름날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누우면 편한 것을 튼튼하지도 않은 다리로 말없이 서서 일만 하고 살았고, 누우면 잠도 달게 오는데 팔다리가 저리도록 잠을 쫓으며 살아온 어머니들 앞에 가을이 천천히 오고 있다.


모으면 큰 재산이 될 줄 알고 아끼고 아끼면서 살지만 티끌은 아무리 모아도 태산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고 아까운 인생만 고생을 시키면서 하루하루를 사는 어머니들, 차표도 없이 타고 가는 인생길에 무슨 의미의 흔적을 남길까?
결혼하지 않은 여인들의 손톱은 예쁘게 자란다. 거기에다 손톱 미용 가게에 들러 손톱 발톱을 더욱 예쁘게 단장을 시킨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자녀를 두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손톱은 자라기 전에 아이들 치다꺼리에 닳아 손톱 발톱에 신경이 가지 않는다.

어머니가 되면 여자는 전혀 딴 사람이 된다. 여자가 되기는 쉽지만 어머니가 되는 일은 순교자가 되는 일보다도 힘이 든다. 아무런 의식을 떠올리지 않고 앞뒤치닥꺼리에 일만 한다. 순교자보다도 더한 진한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나이가 들어 노년이 되어도 어머니를 그리워한다. 어머니에게는 손톱이 다 닳도록 일을 하면서도 계산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따스한 것에 연습이 잘 된 어머니들의 마음은 솜 같다.

칼날 같이 예리한 사회에서 마음을 베이면서 살아가면서도 자녀들에게 따스한 이부자리가 되어주는 어머니들의 시린 마름에도 가을이 온다. 추수할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찾아오는 가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타내지도 못하고 털어버리지도 못한 멍들 것들이 타들어 가면서 붉은 색을 띠우는 단풍들, 온몸으로 희생한 여름날의 꿈은 다 사라지고 허탈하게 남는 어머니들의 가을 색깔이 진한 단풍의 색깔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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