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롬니의 위기, 레이건에서 배워야

2012-09-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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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석(한인유권자센터 상임이사)

닉슨의 워터게이트 덕분에 제럴드 포드가 어영부영 대통령이 되었다. (포드는 선거에 의해서 대통령이나 부통령에 선출된 적이 없이 대통령직을 수행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포드는 1973년 스피로 애그뉴 부통령의 사임에 따라 닉슨대통령에 의해서 부통령에 지명 되었고 1974년 8월 닉슨대통령의 사임에 따라 대통령직을 물려받아서 대통령에 올랐다.

포드 대통령은 닉슨의 잔여임기 후 공화당의 예비경선에서 현직의 프레임으로 레이건의 도전을 물리쳤다. 그러나 본 선거에서 민주당의 지미 카터에게 패했다. 예비경선에서 패한 레이건은 카터의 4년 임기 동안에 자신의 본질을 되찾고 당으로부터 자신의 신뢰를 만들어 내는 데에 총력을 기울여 보수층의 기반을 공고히 했다.


레이건이 다시 대선후보로 나왔을 때인 1980년대도 역시 사회적인 분위기엔 워터게이트에 대한 책임론이 팽배했다. 동시에 지미 카터의 대외정책으로 인하여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힘과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해 있었다. 오일파동으로 인한 경제불황은 최악이었다. 경제가 성장하지 못하는데도 인플레가 지속되는 희한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란의 호전적인 세력은 카터 대통령의 무기력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 인질들을 400여 일 동안이나 억류하고 있었다. 미국은 도대체 어디까지 굴러 떨어질 것인가?

미국인들은 20세기 초 영국이 걸었던 몰락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러한 어려움에 직면한 미국인들은 지미 카터에게서 보다는 그 이전의 공화당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부터 책임을 묻는 분위기였다. 레이건은 공화당의 책임을 부인하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동시에 그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바닥을 보이는 미국을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명분을 갖고 시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시민의 생활이 어려울수록 레이건의 호소는 시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유발 시켰다. 자신이 내세우는 보수주의를 미국의 정신으로 포장해서 희망의 무드로 살아나게 했다. 1980년 레이건은 현직인 ‘지미 카터’ 대통령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미국의 제40대 대통령에 당선 되었다.

지난주, 양당의 전당대회를 모두 참관하고서 알아차린 것은 롬니 캠프의 위기를 레이건의 방식으로 탈출하려는 공화당측의 캠페인이다. 롬니의 전략적 탁월함이다. 그는 1976년의 레이건을 충분히 공부한 것 같았다. 닉슨의 워터게이트 잔해를 뒤집어 썼던 레이건의 인내가 롬니에게서 보였다. 전당대회에 불참하는 것이 도움이 될 정도로 전임(조지 부시대통령)은 당을 말아 먹었으니 그 당의 후보로서 참고 견뎌야 할 것이 얼마나 많고 울화통이 터지겠는가?

플로리다 전당대회에서 미트 롬니는 분명히 자기의 십자가(부시대통령의 실정)를 회피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오히려 그는 부시의 공화당원들이 강하게 권유한 폴 라이언을 부통령후보로 지명했으니, 좋든 말든 공화당원임을 확고히 했다.
1980년 레이건은 상대후보인 지미 카터를 “방향타 없는 국가의 선장”이라 비유하면서 “카터가 일자리를 잃으면 경기는 회복 된다”라고 유머러스하게 캠페인을 했다.
롬니의 희망은 당파적인 네거티브가 아니고 1980년의 레이건을 따라야 한다. 오바마의 성과를 따질수록 그 만큼 조지 부시의 책임론도 따라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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