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옛영화 감상하기

2012-09-1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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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한국 김기덕 감독의 ‘피에타’가 제68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영예인 황금사자상을 받아 한국영화사에 경사가 일어났다. 한국영화가 세계3대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얼마 전 뉴욕한국문화원에서 6.25전쟁 후 민중들의 오락 갈증을 해소시켜준 한국영화 중흥기에 만들어진 영화를 왕창 빌려다가 한꺼번에 본 일이 있다. 성우가 배우의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려주던 당시, 과장된 대사가 우습기도 했지만 주제와 배경, 의상 등이 그 시대 생활상과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가장 먼저 1950년대를 대표하는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대학교수 부인의 춤바람을 소재로 해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킨 영화로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다.
여자들은 다 사업을 하고 있고 춤도 출 수 있어야 하고 “뭐든지 최고급품으로 주십시오, 최고급입니까”하는 사기꾼의 대사가 나온다. 양품점의 물건들은 미군 피엑스나 밀수를 통해 흘러나온 것들이었다. 가정주부가 집에서, 댄스홀에서도 한복입고 춤추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배우 김승호의 구수한 연기가 빛나는 ‘마부’는 홀애비가 짐수레를 끌어 자식 넷을 부양하는 이야기다. 늘 자식 걱정과 빚에 쪼들리며 살지만 마부는 희망을 잃지 않는다. 1960년대초 서울에 자동차와 말이 교통과 운반수단으로 공존했고 신흥부자와 막노동꾼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사회구조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은 1950년대 힘든 현실 속에서도 성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나 좌절하고 마는 샐러리맨 철호(김진규역)의 가정을 통해 6.25직후의 암담한 현실을 비판, 고발했다. 이 영화를 보면 뚜렷한 직업과 일할 곳이 마땅찮던 그 시대를 산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상당히 힘들게 살았겠구나 싶어 마음이 애잔해진다.
한국 스릴러 영화의 걸작인 60년대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 어느 날 식모가 들어오고 식모의 유혹에 넘어간 가장, 식모의 복수와 쥐약을 둘러싼 죽음이 이어진다.
당시 산업화 시대를 맞아 웬만한 여성들은 모두 공장에 다녀 공장 안에 음악부와 사감이 있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60년대 중산층을 대표하는 피아노, 2층양옥, 식모, 쥐약 같은 것은 옛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1962년에 나온 영화 ‘무정’에서 1.4후퇴때 피난온 문옥(최은희역)은 보석상 길사장의 첩으로 다방 마담으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한다. 병든 아내를 둔 작곡가 강상규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면서 모든 것을 잃게된다.

두 남녀가 반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만나 커피를 마시는데 창밑으로 보이는 서울 시내 모습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해운대는 변변한 호텔 하나 없는 쓸쓸한 해변인 점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했다. “그 시절 정실의 인정아래 첩살이 하는 여자들이 있었지’하는 것도 새삼 인식했다.

옛영화를 보다보면 ‘아, 우리가 저렇게 살아왔지’ 하는 과거가 떠오르고 잊어버렸던 추억들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면 속에 고스란히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지금 우리는 먹고 자고 걸치는데 온갖 호사를 다 누리고 있지만 과거에는 추위와 배고픔, 실직상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별로 없었다.

미국에 살면서 아이폰과 아이패드 시대를 사는 한인 2세가 “내가 어릴 때는…”하고 부모가 고생한 옛이야기를 꺼내려 하면 손부터 설레설레 흔든다면 옛 한국영화를 함께 보자고 하자.

처음엔 도시 변두리 산비탈의 달동네를 보고 외계인 생활처럼 여기다가 “왜 저렇게 못살았어?”-“언제부터 잘 살게 되었어?”-“지금 한국사람들 명품 엄청 좋아하던데?“로 질문이 발전해나갈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질문이 많아지고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가 살아온 시대를 알고싶어 하는 것은 자신의 뿌리 캐나가기가 시작된 것이다.

모국의 역사와 가정사를 어렵게 공부할 것 없이 그 시절 시대상을 보여주는 옛영화 한 편이 자연스레 머리에 들어오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아간다. 잘된 영화는 좋은 시청각 교육 자료가 된다.

민병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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