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억장지성’

2012-09-12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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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억장이 무너진다’는 말이 있다. 너무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에서, 아니면 몹시 놀라거나 화가 극도로 치민 상태에서 나오는 표현으로 대개 말하는 사람이 자신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치면서 울부짖는다. 최근 이명박 대통령도 이 말을 썼다. 이 대통령은 “저의 가까운 주변과 집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 고개를 들 수 없다” 며 ”억장이 무너진다”는 대국민 사과성명을 발표했다.

억장이란 말은 원래 높은 성이라는 뜻의 ‘억장지성(億丈之城)’에서 나온 것으로 마치 정성들여 높이 쌓아올린 성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억울하고 참담한 심정을 의미한다.


최근 한국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끔찍하고 잔인한 성폭행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쌓아올린 높은 성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듯 억장이 내려앉는 느낌이다. 더구나 나주에서 일어난 초등학생 어린이 성폭행 사건은 너무나 섬뜩하고 소름이 끼쳐 차마 입에 올릴 수조차 없다. 인간의 짓거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어서 뉴스를 들은 사람들이 용의자의 야수 같은 범행에 치를 떨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어린 소녀를 인간의 탈을 쓰고 그처럼 무참하게 짓밟았다는 사실에 모두가 경악했다. 가해자는 잠자는 아이를 이불로 씌워 어깨에 둘러메고 몹쓸 짓을 하기 위해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 범행 장소로 향했다. 소녀가 울며 반항했지만 용의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짓밟고 탐욕을 채웠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이었다.

어린이와 어른을 가리지 않는 이런 잔인무도한 성폭행 사건이 한때 동방예의지국을 자부하던 한국 땅을 검게 물들이고 있다. 한국은 이제 점점 인간이 사는 나라가 아니라 인간이기를 포기한 짐승들이 사는 야수의 나라로 변모해가고 있는 분위기다. 최근에 기억나는 것만도 나주 가정주부 집단 성폭행(피해여성 자살), 통영 초등학생 성폭행(피해학생 살해), 만삭임산부 성폭행(임산부 자살) 외에 부천여고생, 나영이, 충남 서산 여대생, 서울 80대 할머니, 밀양 여중생 등 성폭행 피해자들이 너무 많아 일일이 다 거론할 수 없다.
더 놀라운 것은 나주 초등학생 사건이 전국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지금도 경찰을 비웃듯 도심에서 여고생 성폭행 사건이 일어나는 가하면, 신분증을 위조한 가짜 경찰이 10대 소녀를 성폭행하는 등 하루도 빠짐없이 성폭행 사건이 이어지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성폭력 상담건수는 총 1948건이었다. 이중 친족 및 친인척에 의한 사건이 273건으로 14%에 달했으며, 지난 5년간 못 잡은 성범죄자도 9,000여명이나 되었다. 특히 아버지가 친딸을 성폭행한 사례들도 적지 않다니 말문이 막힌다. TV에서 연일 성폭행 사건이 떠들썩하게 보도될 때마다 자식들 보기가 부끄러워 얼굴을 들기가 어려운 심정이다. 주변의 다른 한인들도 고국에 있는 딸과 손녀딸들의 안위를 염려한다.

허술한 법망은 물론 극심한 부익부 빈익빈, 승자독식사회가 빚은 반인륜적 행위에 이제 한국의 지도층은 모두 책임을 지고 피해자들, 특히 어린이들을 지켜주지 못한데 대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성폭행 희생양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선량한 백의민족으로 남의 나라를 침공한 적이 없는 한국인은 열강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취약점 때문에 무수한 외침에 풍전등화처럼 위기를 겪으면서도 꺼지지 않고 살아남는 지혜와 의지가 있는 민족이다. ‘통곡의 벽’을 마주하고 한스런 눈물을 뿌리는 히브리 민족과 달리 절망과 억압 속에서도 해바라기처럼 해를 향해 일어섰고, 가을 하늘처럼 해맑은 정신으로 부패와 반인륜적 행태를 문학과 예술로 풍자하며 나라를 고고하게 지켜왔다.

그런 나라에 지금 현대판 소돔과 고모라가 연출되고 있다. 요즘 한국엔 7만여 개의 교회가 있다고 들었다. 요즘 같은 말세에 그 많은 교회가 무슨 역할을 맡고 있는지 궁금하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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