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박정희와 장준하

2012-09-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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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영(전 언론인)

두 사람은 너무나 다른 인생을 살다가 똑같이 비명횡사하였다. 일제통치, 해방과 분단, 전쟁, 혁명과 군사독재. 암울한 한국현대사에서 이 두 인물은 서로 대척점에 서서 치열하게 다투다가 한명은 부하에게 다른 한사람은 권력의 마수에 암살되었다. 젊은 시절부터 권력추구 한길로 내달려 끝내 정상에까지 오른 박정희는 반대파를 허용하지 않는 혹독한 독재 권력을 휘두르며 민중의 희생을 바탕으로 유례없는 단기간에 나라의 공업화를 이룩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분단의 심화된 모순 속에서 정치적 반대파와 소외계층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탄압. 말살하는 무리수를 감행하던 중 부하에게 사살되었다.

한편 일본에서 대학을 나와 학병으로 징집되어 만주에 끌려간 장준하는 서주에서 학병동지들과 탈출에 성공한다. 추위와 굶주림속 제비도 넘지 못한다는 파촉령 험한 산맥을 넘어 6000리 장정 끝에 중경대한임시정부에 도착. 광복군에 합류한다. 이어 그는 서안에서 미군 정보기관 OSS에 가입. 게릴라 훈련을 받으며 항일전을 준비하다가 종전을 맞아 해방된 조국에 돌아와 건국준비활동을 벌인다.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1953년 피난지 부산에서 35세의 젊은 나이로 월간 사상계를 창간 이승만정부의 폭정과 부패와 필봉으로 싸우는 자유와 민권운동의 기수로 나선다. 사상계의 정론은 여론으로 확산하고 다시 정치적 힘이 되어 4.19혁명의 불씨로 번졌다.
총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하에서도 그는 민주투사로 다시 치열한 저항의 삶을 이어간다. 군사독재에 맞선 민주투사로서 문필가로서의 타협 없는 투쟁은 국제사회에서도 인정되어 1962년 장준하는 한국이 최초의 막사이사이상을 받는다. 72년 10월 박정희가 두 번째 쿠데타 10월유신을 선포하자 그는 다시 헌정을 파괴한 유신체제에 대항하여 민주주의와 평화통일 운동의 선봉장으로 나선다. 73년에는 유신헌법폐기 백만인 서명운동을 백기완과 함께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긴급조치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등 독재자의 저격수, 재야운동의 지도인 그를 사람들은 ‘재야 대통령’으로 불렀다.

장준하는 박정희에 맞서 37번의 체포와 9번의 투옥을 거듭하며 한때 옥중에서 출마, 7대 국회의원에 서울 동대문에서 당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세비를 받아 부인의 손에 쥐어줘 본적이 없었다고 한다. 사상계 잡지 경영때 누적된 채무 때문에 모조리 압류되었기 때문. 가정형편은 풍비박산되어 사글세방에서 부인은 파출부 등으로 생계를 꾸렸고 자식들 5명은 모두 돈이 없어 대학문턱에도 못 갔다. 이런 그의 형편을 알고 있는 독재 권력은 끈질기게 회유하였다. “친일파 일본군장교였던 자가 총칼로 권력을 잡은 것은 불행한 일이나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국민이 그를 대통령으로 뽑을 수는 없다”고 단호하게 그는 거절한다.

반유신 투쟁도 고비에 이른 1975년 8월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장준하는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57세의 파란 많은 그의 인생은 이렇게 끝났다. 당시 검찰은 실족추락사라고 발표, 사건을 서둘러 묻어버렸다. 이번에 백일하에 들어난 증거는 예리한 흉기로 머리를 가격 벼랑 아래로 밀어버린 살인이었음을 누가 봐도 명백하게 증언하고 있다. 지난 일을 들춰내 정치공세를 편다는 얼빠진 비판론도 들리지만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한다. 억울하게 학살된 한 열혈 애국자의 주검은 경제발전을 혼자 이룩한 양 선전하여 기승을 부리고 있는 유신세력의 부활을 허용하지 말 것을 말없이 호소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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