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성(聖)과 속(俗)

2012-08-2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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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상기(‘역사가 말 못 하는 것’ 저자)

서양의 모든 종교는 성(聖)을 섬기며 사람은 하잘 것 없는 노예로 취급한다. 그러나 동양의 불교는 다르다. 불교에는 성과 속이라는 차별적 이원론(二元論)이 없고 무차별적 일원론(一元論)이 있을 뿐이다. 서양종교가 성(聖)을 건설하는 내용이라면 불교는 성(聖)을 해체하는 내용이다. 철학적으로도 서양에서 이원론적 가치체계를 해체하려는 이른 바 해체철학이 20세기에 등장했지만 동양에서는 이미 기원전 500년 경에 부처에 의해 제시됐다.

선불교 경전이라 할 수 있는 벽암록 첫 번째에 양무제가 달마대사에게 ‘불교의 최고로 성스러운 진리가 무엇이냐’ 물으니 달마는 ‘텅 비어 성스러운 것이 없다’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 불교에는 성스러운 것이 없다. 금강경 첫 부분에도 부처의 걸식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걸식은 사람(거지)이 먹고사는 수단이다. 걸식은 무소유의 상징이지 성(聖)과는 거리가 멀다.


부처는 또 말했다. ‘형체(부처모습)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는 것은 사도(邪道)이며 여래를 보지 못한다. 이는 상(像)에 의지하는 태도를 거부하는 강력한 경고이다. 그러니 오늘날 대궐과 같은 절간에 으리으리한 불상을 앉혀놓고 빌며 절하는 풍습은 종교미신이지 불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의 경우 예수의 이해도 케리그마(kerygma)적 예수냐 아니면 역사적 예수냐에 따라 달라진다. 케리그마적 예수는 예배의 대상으로 교회용 아이디어러지(ideology) 로서 성(聖)의 위치에 있지만 역사적 예수는 민중과 함께한 사람이었고 성도(聖都)라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갈릴리에서 살았다. 그리고 예수의 마지막 순간은 그의 참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감격적 장면이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가 15:33-34)’ 하나님 부재현실에서의 실존적 절규이다.

나는 여기서 참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한다. 희랍의 소크라테스가 사약을 기꺼이 마셨다는 이야기와 대조적이다. 소크라테스는 영과 육의 이원론과 영혼불멸을 믿은 희랍의 사상가였지만 예수는 영과 육은 하나의 사람 몸이라는 유대전통의 일원론자였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직업적 종교인들이 들으면 펄쩍 뛰겠지만 부처와 예수는 모든 것을 하나로 보는 사람들이었다. 사람, 사람(humanist).

성(聖)이란 원래 없던 것을 종교를 위해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기독교는 바울을 비롯 신학자들이 희랍사상에 물들어 이원론에 따라 성(聖)을 받들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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