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다시 찾은 자존심

2012-08-2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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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최근 한국과 일본의 갈등이 첨예화된 가운데 워싱턴D.C.에 있는 대한제국 주미공사관을 102년 만에 되찾았다는 소식이 21일 들려왔다.워싱턴D.C. 한인을 비롯 미주한인들은 십여 년이상 이곳을 찾고자 건물매입 대금에 필요한 모금운동을 전개했고 한국정부도 예산을 편성했다가 취소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노력했지만 애만 태우고 성공하지 못했었다. 당시 역사보존협회 이사로 활동하며 공사관 건물 되찾기에 노력했던 고종황제의 손녀 이해경 여사는 “황손으로서 내가 이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일본의 그릇된 행위를 세상에 알려 궁극적으로 공사관 건물을 되찾고 이를 한미역사박물관으로 승화시키자는 숭고한 뜻을 따르기 위해서”라고 말했었다.

드디어 한국의 문화재청과 문화유산국민신탁은 구한말 조선이 국외에 설치한 공관 중 유일하게 원형이 남아 있는 주미공사관을 사들였다니 정말 기쁘다.왜 미주한인들은 이 건물을 결사적으로 되찾으려고 했을까, 그 건물은 험난했던 근대사에 구한말 자주외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역사보존협회 자료에 의하면 고종황제가 1891년 내탕금(개인자금) 2만5,000달러를 주고 자신의 명의로 구입한 건물을 일본제국은 조선을 강제합병한 1910년, 고종의 서명을 위조한 뒤 단돈 5달러에 주미일본대사 우치다에게 판다는 허위계약서를 만들어 빼앗았다. 일본은 이 계약서를 바탕으로 그해 9월 어느 미국인에게 10달러에 팔아넘겼다.


당시 조선은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선 시기로 청나라의 군사적 압력, 러시아의 위협 증대, 영국 군함의 거문도 점령 등등 일련의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었다. 1890년 고종은 일본 정부에 군함 구입을 타진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고 청나라에서도 방해하여 실패했다. 그래서 그 다음해인 1891년 주미공사관을 구입, 1882년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조선은 그곳에서 청과 일본, 러시아 등의 세력확대를 방지하기 위해 자주외교를 펼쳤던 것이다. 이 주미공사관은 백악관에서 자동차로 북동쪽 방향 10분 거리의 로간 서클 역사지구에 지하 1층, 지상 3층의 빅토리아 양식으로 1877년 건립됐으며 조선정부는 1891년 11월 이 건물을 사들여 대한제국말까지 사용했었다. 앞으로 이 건물은 한국 전통문화 전시·홍보관 등으로 활용할 계획이라 한다. 민족독립과 자주 외교를 위한 교두보로 쓰여진 이곳은 험난한 한민족의 역사가 서린 곳이다. 한국의 전통문화 전시관뿐만 아니라 일제 36년사의 자료관도 생기기 바란다.

워싱턴 스미소니언 수장고에는 19세기말 한미수교때 수집해 간 3,000여점의 한국물건이 카드조차 만들어지지 않은 채 긴 잠에 빠져있다고 한다. 전문 인력이 없기 때문이란다. 한국의 전통문화는 이처럼 여러 곳에 전시될 수 있지만 주미공사관은 좀 성격이 다른 전시장이 설치되어야 한다. 2010년 뉴저지 팰리세이즈 팍에 ‘일본군 강제위안부 기림비’가 건립되었고 2012년 뉴욕 롱아일랜드 낫소카운티에 제2의 일본 종군위안부 기림비가 세워졌다. 세계정치의 중심지인 워싱턴DC 주미공사관 건물 앞에 제3의 기림비가 세워지길 기대한다.이곳에서 우리는, 후세들은 역사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일본인 중에는 아직도 패전을 종전이라 하고 만주-조선-대만을 ‘반환했다’는 대신 ‘잃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잃었다는 것은 원래 자신의 것이라는 말인데 잠시 강탈해서 다시 돌려준 것을 잃었다고 하는 그들의 의식이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의 징병, 징용, 학병, 정신대, 단돈 5달러에 강탈 당했다가 102년만에 우리 품에 돌아온 주미공사관의 역사적 사진과 자료를 남김없이 찾아 정리하고 영원히 전시해야 한다. 전 인류에게 당시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조만간 워싱턴을 가게 되면 이곳을 방문하고 싶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주권을 상실한 비운의 군주가 아니라 자신의 온몸을 던져 자존심을 챙기고 내탕금으로 구입한 건물에서 자주외교의 구심점을 삼으려 했다는 점을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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