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

2012-08-2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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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 / 목사)

그대는 올림픽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필자는 선수들의 열심을 보았다. 메달과 관계없이 열심히 달리는 선수들의 모습은 이기나 지나 감동적이었다. 항가리의 축구 선수 프스카스는 기자 회견 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공을 차고 있지 않을 때는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축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을 때는 축구에 대한 생각을 한다.” 이쯤 되면 그 열정은 축구에 미친 것이다.

나는 열심이 성공을 가져온다고 생각한다. 게으르면서 성공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성공이란 지나가는 길에 가로채는 것이 아니고 열심이라고 부르는 계단을 하나씩 딛고 올라섰을 때 주어지는 것이다. 회사에서 출세하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든지 어리석은 사장을 만나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면 별로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만 많이 하는 사람은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밀려난다. 결국 세상은 열심있는 사람들이 승리하게 되어있다. 종교도 열심을 내어 헌신하지 않고 머리로만 이해하고 습관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결국 회의에 빠지거나 허탈해져서 낙오된다. 열심을 내면 스스로 신이 나고 일이 잘 진척된다. 빨리 달리려면 체중을 앞으로 기울여야 한다(전진적 자세).

화가 피카소는 혼자 외롭게 죽었다. 방문객에 의해 그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최후의 모습은 후세에 깊은 감명으로 남았다. 그의 손에 크레파스가 들려져 있었고 침실에는 화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 그림을 그리다 간 것이다. 피카소가 만일 자기의 그림을 찢어버리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작품이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파괴하는 삶을 살았다. 창조와 파괴, 그것은 문명 발달의 요소이기도 하지만 개인 생활에 있어서도 필요한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초대교회(1세기의 기독교)의 물질적 유산은 거의 없었으나 그들의 정신적 유산은 전 세계를 정복하였다. 그들은 진실했고 열정이 있었으며 그 사회에 본이 되는 사랑 실천의 작은 무리였다. 열심을 뜻하는 영어 Enthusiasm은 그리스어의 en deos 즉 ‘하나님 안에서’란 뿌리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만일 내가 미쳤다면 하나님을 위하여 미쳤다”(고린도후서 5:13-14)는 극단적인 표현을 썼다. 그런 열정적인 생활이 가능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밀어주었기 때문이다”이라고 설명하였다. 자기가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는 감동이 사랑 실천의 동력이 되었다는 뜻이다.

“열심을 내라.”(요한계시록 3:19)는 성경의 충고는 미지근한 사랑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경고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렬한 사랑을 요구하신다. 참 사랑은 미지근할 수가 없다. 열심은 사랑을 증명한다. 열심히 기다리고, 열심히 사모하고, 열심히 생각하고, 열심을 내어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자기가 하는 일에 열정을 기울여야 한다. 열정다운 열정을 쏟아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 이상의 비극은 없다.

올림픽은 아마추어 정신의 결정체이다. 발전을 위하여 경쟁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정을 경쟁보다 한 발자국 앞세우는 것이 올림픽이며 나는 이런 태도를 ‘아마추어 인생’이라고 부른다. 싸우고 정복하는 방법으로 행복은 오지 않는다. 개인이나 사회나 우정과 형제애가 수립되지 않는 한 평화는 바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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