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랑담배와 10분간 휴식

2012-08-09 (목)
크게 작게
김근영(목사)

우리가 조국의 부름 받아 군대 갈 무렵 군대 가기 싫어서 작두로 방아쇠를 당겨 손가락을 잘라 병역 기피하는 용감한 친구도 있었다. 필자는 그런 용기는 없어 결국 군대에 끌려가고 말았지만 뜻밖에도 군대에서 값진 보석을 만난 추억이 있다. 예수 믿는다며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총 겨누는 서글픈 나의 자화상 앞에서 전쟁과 평화, 죄와 벌을 몸소 체험할 수도 있었고, 눈 내리는 저녁 비무장지대 안에서 지뢰를 밟아 발목 잃고 엄마 찾아 우는 어린 사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산가족의 아픔도 느낄 수 있었고, 용서하는 복음, 정리하는 율법, 선과 위선, 노동과 휴식의 소중함을 체험한 귀중한 시간들이었다.

무엇보다 만나기 어려운 악성 베토벤을 만나던 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시는 예수를 만난 일, 더욱 잊지 못하는 운명적인 만남은 휴가를 통해 지금의 그녀를 만난 일이다. 제일 불행한 만남은 담배골초 봉춘이를 만난 일이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때만해도 한국기독교 사정은 ‘술 · 담배 끊고 예수 믿어라!’는 슬로건까지 내걸었고 그것이 신앙생활의 척도로까지 생각할 때였다. 필자도 예외 없이 평양의 전통적 3대 목사가정에서 엄격한 율법 보수주의 가정에서 잔뼈가 굵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군대생활에서 이봉춘이 같은 무신론자이자 담배골초, 술고래가 내 조수가 됐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한편, 군대 가본 사람들은 다 느끼는 일이지만 힘든 훈련 속에 ‘10분간 휴식’이란 시원한 코카콜라 이상의 복합적 의미가 함축된 중요한 시간이란 것에 다 동의할 것이다. 나는 그 시간에 성경을 꺼내 읽었지만 다른 전우들에겐 그들의 화랑담배가 복음이나 마찬가지였다. 화랑담배 연기 속에 전우여 잘자라는 노래도 있듯이 그 시간에는 그리운 고향처녀의 얼굴, 부모형제의 모습 등이 상상의 날개를 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소중한 자유 시간이었다.

나는 휴식시간마다 담배에만 목을 매고 있는 봉춘이를 교회로 전도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담배 끊고 교회가자” 몇 번이나 시도해 보았으나 번번이 “난 무신론자이고 술 · 담배 하는 사람인데...”하며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감히 고참명령을 우습게 아는 봉춘이, 속으론 좀 괘씸한 생각도 들었지만 군대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할 말이 없었다.그동안 나에게도 지급되는 화랑담배가 서랍에 가득 쌓여있었고 담배가 없어 쓰레기통 뒤지며 쩔쩔매는 봉춘이를 불쌍히 보며 그동안 모아놓은 담배 다 줄 테니 교회 가겠느냐 제안했더니 그제야 비겁하게 나를 따라 나섰다. 물론 지금 나를 따라 교회 다니고 있는 10여명의 졸병들도 다 화랑담배에 유인된 비겁한 예수쟁이임에는 두말 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도 담배가 그리워 초조해하던 봉춘에게 나는 쪽지를 써서 “봉춘아, 조금만 더 참아라. 10분 후에는 설교 끝난다” 달래면서 담배전도사 김병장은 전역특명을 받고 봉춘이를 결국 교회로 인도하는데 성공하고 이별했다.
어느덧 그 아름답던 추억들은 다 흘러갔지만 그때 받던 인생군대 훈련은 아직도 끝나질 않고, 그때 만난 그녀와 함께 수많은 세월동안 휴가한번 떠나지 못한 우리의 이민생활에 언제 휴식시간 주실 건지? 하며 그때 만난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그리웠던 ‘10분간 휴식시간’을 생각해 본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