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만한 이 세상!

2012-07-16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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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저, 혹시 모 작가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계십니까?” “왜 그러십니까?” “그 서점을 통해 책을 보내주셨어요. 그래서...” 책명을 듣더니 서점에서 “그 책은 작가가 보낸 것이 아닙니다.”“그럼?” 서점 주인의 말은 어떤 분이 같은 책을 두 권 사더니 다음 주소들로 보내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선물로 받은 책이 서점 봉투 안에 있었고, 바로 그 작가와는 알고 지내는 사이다. 사례 전화를 하려는데, 교환의 “전화번호를 체크하라”는 말만 되돌아와서, 서점에 문의한 것이었다. 이렇게 한여름의 산타클로스를 만났다. 필자가 읽고 싶어 할 책을 선택한 그는 과연 누구일까. 직접 책을 보내지 않고, 그 일을 서점에 일임한 섬세한 마음씨의 그 분께 깊이 머리 숙인다.

지난해 일본의 쓰나미를 이겨낸 기적의 소나무를 보존하기 위해 페이스북을 통한 모금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7만 그루의 소나무는 전멸했고, 단 한 그루만이 살아남았다는 기적의 소나무 모습이 장하다. 호리호리한 높은 키 윗부분에 있는 우산모양의 나뭇가지에만 솔잎이 달려있다. 그 소나무는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온 몸에 방부제를 칠하려면 거액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이 소나무를 건강하게 되살리려는 노력은 그가 ‘희망’ 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에 온 세계의 뜻있는 이들로부터 모금을 시작하였다고. 사람은 자연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한다.


건강한 자연 속에서 건강한 인간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우리는 항상 자연의 건강 상태에 유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한 몸이니까. 신문에 게재된 감사장이 눈길을 끈다. 감사장에 실린 소년의 밝은 미소 때문이다. 그는 며칠 전 교통사고로 멀리 떠났고, 이 감사장은 소년의 부모가 가족과 함께 슬픔을 나눈 분들께 올리는 글이다. 글의 마디마디에 소년에 대한 사랑, 어려움을 이기려는 노력, 문상에 대한 사례의 마음이 흠뻑 스며 있다. 마침내 이 가족은 슬픔을 너머서 그 소년의 뜻을 살리기 위한 기념사업을 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신문에 실린 소년의 밝은 미소에 볼을 댄다.

물질문명이 만발한 디지털시대에 이런 동화의 나라가 있다. 한국의 주재원이 “독재하며 호의호식하는 특권층이 밉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전생에 덕을 많이 베풀었을 것”이라고 대답하였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나”라고 물었더니 “그들은 내세에 가축으로 태어날 것”이라고 대답하는 그들의 표정이 온화하고 평화로웠다는 글을 읽었다.

미얀마의 이야기다. 남들이 가난하다고 보는 나라의 행복지수가 높은 이유는 이렇게 생각의 바탕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끔 이 세상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느낄 때가 있다.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등을 생각하는 철학자가 되기도 한다.

소위 발달한 나라들보다, 소위 미개하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까닭은 무엇인가. 결국은 마음가짐에서 차이가 생긴다고 본다. 말하자면 행복에 대한 정의나, 행복지수는 주로 자기 자신이 느끼는 것이라고 본다. 햇빛에도 음지와 양지가 있고,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도 음지 된다.

나 자신은 가진 것이 많음을 감사하고, 바람 부는 날은 개인 날을 기다리고, 높은 산은 낮은 산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마음의 평화를 주지 않을까. 크고 작은 범죄사건들만 보고 듣고 있으면, 인간 사회가 붕괴되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러다가 인간미 넘치는 소식을 들으면 나 자신도 그 사회의 한 사람인 것이 자랑스럽다.

앞에 예거한 이야기들은 행복감을 준다. OECD 나라 중에서 한국의 행복지수가 낮고, 자살하는 수효가 많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인생을 바라보는 각도를 바꾸면 “살만하다 이 세상!” 하고 외치지 않을까. 어디 자연만 아름다운가, 이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이 인간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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