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슬픔 중에도 새로운 기쁨을~

2012-06-30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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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어느 날 내 사랑하는 소녀가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이 온통 이별의 무대로 빙빙 돌던 시간/ 고운 꽃 한 송이 지난해에 피었던 바로 그 꽃자리에/ 그대로 피어 있음을 새롭게 발견한 기쁨/ 눈여겨보던 새 한 마리 포르르 날아와/ 늘 같은 자리에 머물다 가는 것을 새롭게 발견한 기쁨/ 슬픔 중에도 아름다워서 고맙다고 나는 두 손 모으네”

이해인시인의 시 중 ‘작은 위로’이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왜 하나님은 가끔씩 아직 채 피지도 않은 꽃봉오리 같은 젊은이를 이리도 급하게 데려가실까? 젊고 활기 있는 청년이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을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악한 이들도 많은데 이들을 제쳐두고 왜 젊고 건강하고 선량한 이들을 먼저 데려가는가?”라고.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 질문은 종교계와 신학계에서도 ‘이거다’라고 명쾌하게 답을 못 내리는 질문 중 하나다. 그것은 신(神)의 실존과 선악(善惡)이 연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악한 사람들은 오래 살게 내버려두고 어떻게 선량하고 착한 사람, 죄 없는 젊은 사람들이 졸지에 죽임을 당하냐?” 답하기 쉽지 않다.
20년도 넘었다. 뉴욕에서 공인회계사로 일하던 어떤 분이 있었다. 그에겐 고등학교에 다니는 사랑스러운 딸이 있다. 그런데 캠프에 참가하고 돌아오던 중 밴이 뒤집히는 교통사고가 일어나 딸은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의 슬픔은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청천벽력이었을 게다. 일 관계로 알던 그분의 그 때 참담한 모습은 말로 형용키 어렵다.
한국에 잘 아는 어느 부인의 남동생은 아주 큰 회사의 중역이다. 그에겐 외아들이 있었다. 장래가 촉망됐다. 군대 영장을 받고 친구와 함께 여행을 떠나 정동진엘 갔다. 길을 걷다가 음주 운전자의 차에 치여 친구는 살고 그 아들은 죽었다. 손자를 애지중지하는 할머니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몇 년 간 알리지도 못했다 한다.

지난 23일 뉴욕 롱아일랜드 서폭카운티에서 한 한인 고등학생이 택시에 치어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어떻게 대낮 오후 1시에 이런 변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 날 벼락같은 이 사고로 아들을 잃은 부모의 찢어질 것 같은 아픈 심정을 누가 이해하고 누가 알 수 있으랴. 세상의 글과 말로는 도저히 위로할 길이 없을 것 같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이다. 둘이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다. 한 몸이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다. 죽음을 이긴 사람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로 수많은 종교들 가운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도 이길 수 있는 종교이니 그렇다.

부활의 신앙은 참 좋은 면이 있다. 죽은 사람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장례식에서 부르는 찬송가.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사망권세 이기도록 지켜주시기를 바라네. 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예수 앞에 만날 때~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 그때까지 계심바라네~” 부활의 소망이다.

9.11때 아들을 잃은 부모가 있다. 아들은 20대로 잘나가는 금융인이었다. 돈도 많이 벌었다. 아침에 “엄마 안녕!”하고 나간 아들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다. 어머니는 아들이 쓰던 방을 있는 그대로 보관하며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다. 10년이 지난 지금 아버지와 어머니는 신앙으로 모든 슬픔과 역경을 이겨내고 있음을 본다.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의 아픔을 모른다. 역경도 마찬가지다. 역경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희망이 되는 것은 내일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간이 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위로다.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해결사와 같다.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 시간이다. 시간 속에 슬픔과 아픔을 흘려버리고 다시 서야 한다.

육체의 고통은 약이면 된다. 마음의 고통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들 마음의 고통. 의지가 된다면 신앙이 가장 좋을 것이다. 지난해 피었던 바로 그 자리에 핀 꽃 한 송이와 눈여겨보던 새 한 마리 날아와 같은 자리에 머물다 가는 것을 새롭게 발견한 기쁨. 소녀의 죽음과, 슬픔 중에도 새로운 기쁨을 발견해 고마워 두 손 모은다는 이해인수녀의 시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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