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옳은 판단인 듯

2012-06-18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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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렬 (교육가)

보기에 민망한 장면이었다. 어른은 꼭 답을 듣고 싶어 하며, 어린이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였다. “네 진짜 엄마 아빠를 알고 있느냐니까...” “저기...”“아니, 너를 낳아주신 분들을...” 어린이는 그만 미국 부모한테 달려가 버렸다. 뒤에 남은 어른은 딱한 듯 바라보고. 냉정히 생각하면 딱한 쪽은 바로 어른이다. 해외에 입양된 어린이들이 성장하여 화제의 주인공이 되면, 으례 국내에선 생물학적 부모를 찾게 되고, 그들이 만나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두 쪽이 만나면 말없이 서로 눈물을 흘리고...이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장면이다.

그래서 프랑스 올랑드 정부 장관이 된 한국계 펠드랭도 같은 장면을 연출할 것으로 예상했다. 뜻밖에 그녀는 아니었다. “친부모는 찾고 싶지 않아”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이어서 그녀는 “나는 프랑스인이며, 친부모나 친척 등 뿌리를 찾고 싶지는 않다”고 확언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에서는 혈통을 중시하지만, 프랑스에서는 태어나서 자란 곳을 의미있게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그녀의 판단이 옳은 듯하다. 입양을 보낼 때 부모 자녀의 관계는 이미 소멸된 것으로 안다. 부모는 두고두고 이 일을 미안하게 생각해야 하고, 자녀는 양부모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그럼 왜 ‘옳은 판단인 듯’이란 애매한 표현을 했나. 그것은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렇다. 그들과의 거리감 때문에 냉정하게 된 것일 지도 모르니까.

자녀와 그들의 성장을 돕는 부모는 친부모, 양부모를 가리지 않고 정성을 쏟는다. 그 대가로 세상에 없는 즐거움을 선물로 받게 된다. 어린 자녀가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움의 극치다. 자녀 기르기를 포기하고 그 일을 타인에게 부탁한 사람들은 자녀를 기르는 노고는 덜었지만, 그들을 가꾸는 즐거움은 잃었다.

그런데 시간제로 양부모가 되어 자녀 키우기를 돕는 직업이 있다. 교사직이 그렇다. 학생들의 교육을 맡는 교사들은 시간제 양부모이다. 주로 그들의 지적 발달이나 사회성 발달에 치중하면서 학생들의 건강한 인격 도야를 위해 정성을 쏟는다. 학부모와 교사가 협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개인이나 단체의 발달을 저해하는 요소 중에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만드는 버릇이 있다. 울타리 중에는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있어서 혼자 스스로 울타리를 만들기도 하고, 여러 사람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기도 한다. 양부모보다 생부모가 자녀를 더 사랑한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우수하다, 국적이 다른 사람들의 결혼은 하나의 모험이다, DNA가 교육환경보다 우세하다... 등은 간단하게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높은 울타리 안에 생각을 가두면, 그것이 편견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답을 얻는다. 아마 부모들보다는 교사들에게 이런 울타리가 없거나, 그 높이가 낮을 지도 모른다. 여러 학생을 시간제로 다루는 양부모이기 때문이다.
생부모, 양부모, 시간제 양부모거나 목표는 하나이다. 자녀나 학생들이 각자의 소질을 최대한으로 펼 수 있는 환경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성장하여 건강한 사회인으로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의 답은 무엇일까. 근래 세계 여러 곳에서 알려오는 한국계 입양아들이 두각을 나타내는 현상과 관계가 있다. 만일 그들이 한국의 생부모한테서 성장하였어도 같은 성과를 냈을까. 이것 역시 쉽게 대답할 수 없다. 어쩌면 본인 자신의 말을 들어봐야 할 듯하다. 프랑스에서 성장한 펠드랭이 말하듯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태어나서 자란 곳을 의미 있게 생각한다”는 것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미국 양부모들 중에 자녀의 생부모를 찾아주려는 노력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펠드랭의 생각이 ‘옳은 판단인 듯’하였는데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만큼 혈통과 환경은 자녀교육의 중요한 요소이다. 내게는 아마 끝까지 그녀의 생각에 물음표가 따를 것 같다. ‘옳은 판단인 듯’ 하지만. 펠드랭에게 묻겠다. 과연 생부모는 무의미한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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