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는 어떤 아버지인가?

2012-06-13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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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 주필

최근 한국 TV에서 각 고장의 노인들과 함께 하는 프로그램 ‘늘푸른 인생’을 재미있게 보았다. 사회자가 출연한 할머니들에게 “세상 떠나신 바깥양반이 보고 싶지 않으세요?” 하고 물으면 대부분이 “아이고, 보고 싶긴… 다시 태어나도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라고 대답했다.

남편과 함께 나온 할머니들은 “그동안 두 분이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물으면 십중팔구 “이 양반이 평생 술, 노름, 손찌검까지 해서 속 많이 썩었지. 그래도 아이들 때문에 꼼짝 못하고 살았어” 라고 털어놨다. 그런데, 한국의 시골이 아닌 인권왕국 미국에 이민 온 한인가정 중에도 아직까지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뉴욕가정상담소의 전체상담 가운데 80%가 아내를 폭행하는 남편에 관한 것이란다. 세상 물정 모르는 남자들이다. 한국에선 65세 이상의 소위 ‘황혼이혼’이 20-30대의 신혼이혼을 앞지르는 추세이다. 젊었을 때 남편의 행패를 견디며 살다가 자녀들이 독립하고 남편이 늙어 힘이 빠지면 기다렸다는 듯이 결별을 선언하는 할머니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하늘을 찌를 듯했던 가부장의 권위는 이젠 옛날 얘기가 됐다. 집안에서 손 하나 까딱 않고 “물 떠다 줘” “신문 갖다 줘”하는 ‘미스터 줘’ 아버지는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게 됐다. 마음대로 소리 지르고 욱박지르고 행패부리는 가장 아래서 살려는 아내나 자식은 어디에도 없다. 특히 권위주의적인 아버지에 낙담한 한인 2세 여성들 가운데 타인종 남성을 결혼 배우자로 택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미 지난 2000년 센서스 통계에서 미국인 남성과 결혼한 한인 여성의 비율이 48%나 됐었다.

한인가정의 경우 대개 남편의 권위는 한국에서보다 줄어든 대신 부인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격상된다. 맞벌이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 경제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안 살림은 여전히 부인의 몫으로 대부분 1인2역, 1인3역을 감당하기 일쑤다. 그런 상태로는 가정이 바르게 설 수 없다. ‘맹모삼천지교’나 하버드대학 중국계 추아교수의 ‘호랑이 맘’ 육아법도 좋지만 그것이 어머니만의 일은 아니다. 아버지도 집안이 제대로 서도록 주춧돌을 옳게 쌓아 올려야 한다.

아버지는 가정의 울타리가 돼야 하며 자녀들의 정신적 기초가 되어 그들이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좋은 길로 인도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의 삶에 누구보다 큰 영향을 끼치는 존재가 바로 아버지다.

작가 토마스 울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인간의 생명을 깊이 탐구해 들어가면 결국 자기의 아버지를 탐색하고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육신을 준 아버지 혹은 어렸을 때의 아버지에 대한 추억 정도가 아니라 ‘나에게 남겨진 아버지의 이미지’를 우리는 탐색하고 있다. 아버지의 힘과 지혜와 사랑과 사상과 신앙 등이 나에게 가장 중요한 뿌리가 되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어떤 존재가 돼야 하는 지를 일깨워준다.

시대상황이 많이 바뀌었고 생활환경도 확연히 달라졌다. 한인사회의 아버지들 가운데는 20-30년 전에 이민 온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 미국에 온 뒤 강산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도 본인들은 바뀐 것이 없어 보인다. 이들 자녀들 가운데 상당수는 부모들이 너무나 완고하고 시대착오적이어서 답답함을 느낄 때가 많다고 토로한다. 가족과도 함께 하지 않아 아버지와의 추억이 없다는 이야기도 흔히 들린다.

오는 17일은 ‘아버지날’이다. 한국에선 5월8일이 ‘어버이날’이다. 아버지들이 어머니 곁다리로 대접을 받는 나라는 한국뿐인 듯하다. 미국, 영국, 중국, 일본 등 37개국은 6월 셋째 일요일을 따로 아버지날로 지킨다.
여름이 되면 옷을 시원하게 벗고 겨울이 되면 따뜻하게 끼워 입어야 하듯이 이제는 시대 상황과 환경에 맞게 사고방식도, 생활양식도 바뀌어야 한다. 아버지들은 이번 아버지날을 계기로 ‘나는 어떤 아버지인지’ 한번 뒤돌아봤으면 좋겠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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