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일본소녀가 뿌린 민간외교의 꽃가루

2012-06-11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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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신록의 계절, 6월은 여름방학의 계절이다. 우리 집안도 6월이 오면 공부에서 해방된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아이들로 북적인다. 작년 여름에도 일본, 캘리포니아, 파리에서 뉴욕을 거쳐가는 학생들로 가득 찼던 국제 캠프였다.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일본의 2차대전 후의 3세대, 4세대 아이들이다.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살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의 색채를 띤 새싹들이다.그런데 나에게 작년 여름 다녀간 학생 중에 강한 인상을 남긴 12살의 일본소녀가 있다. 하루는 저녁밥을 먹은 후 모두 거실에 모여 앉았다. 그런데 12살의 일본소녀가 공손히 절을 하면서 베토벤 교향곡3번 영웅(Erica) 곡의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겠다고 한다.


일본소녀가 피아노 앞에 곧은 자세로 앉아 장엄하고 웅장한 곡을 악보도 없이 힘찬 박진감으로 거침없이 치기 시작한다. 들꽃같이 가냘픈 소녀가 폭발적인 에너지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마치 당시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으로 유럽의 지축을 흔들었던 말발굽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피아노를 친 후 소녀가 나를 다시 깜작 놀라게 했다. 소녀는 식탁에 앉아 종이에 증조부에서 손자까지 이어진 가계 보(Family tree)의 도표를 그린 후 수직과 수평의 가족관계를 한자로 또박 또박 쓰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소녀가 회과자신(悔過自新) 라는 사자성어를 내게 설명한다. 잘못을 뉘우치고 새 출발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무리하게 주변국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 만행과 잘못을 뉘우친다는 뜻을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그 아이에게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또한 나는 그 아이의 한문실력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일본정부는 디지털 시대에 맞도록 사이버 공간을 통해 한자 배우기를 강화하는 대폭적인 혁신을 추진했다. 일본 초등학교 일학년에서 한자공부를 시작해서 고교 입학까지는 신문, 잡지를 읽을 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뿐만 아니라 일본의 신문 보급률은 국민 2인당 1부 이상으로 높은 발행 부를 보이고 있다. 한국은 해방 후부터 ‘한글전용’이나 ‘국어한문 혼용’ 이라는 한글만 고집하는 우물 안의 개구리 식의 논쟁으로 갈팡질팡했다. 그래서 나는 일본어도, 한문도 배우지 못했고 영어도 모국어가 아닌 어두운 언어를 잃은 공황시대의 터널을 지나고 있지 않은가? 떠오르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개척해야 하는 미래의 아이들이 한문을 안다면 소통이 가능해질 것이다.

투자의 귀재인 로저스(Jim Rogers)는 어린 딸에게 주는 조언을 담은 책에서 “21세기 미래를 개척하려면 중국어를 배워라”라는 말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지금 어린 딸에게 중국인 보모를 두어 중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집 여름캠프에서 같이 잠자고 먹는 아이들이 일본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마도 태평양 바다에 떠있는 섬나라로 한때 글로벌 IT 시장을 주도했고 초대형 지진과 쓰나미가 해안 도시를 집어 삼켰던 섬나라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가장 가까이 근접한 나라이면서 기름과 물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숙적의 나라가 된 질곡의 역사는 모를 것이다.

독도 영유권문제, 일본강점기의 역사왜곡 등 한일외교관계의 상처는 아직도 봉합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거실에는 일본소녀가 뿌린 민간외교의 꽃가루가 피아노 건반 위에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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