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하지감자’

2012-05-3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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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업(자유기고가)

우리나라에는 한 해 제일 일찍 수확하는 ‘하지감자’가 있다. 보리타작하기 전, 6월에 들어있는 절기 ‘하지’ 를 전후해 캐서 먹는다고 해서 ‘하지감자’ 라고 한다. 옛날 우리가 겨우내내 가을 농사 식량으로 살다가 봄이 시작되면서 모든 양식이 바닥이 나고 햇보리가 날때까지 연명하며 기다릴 수 있는 생명과도 같은 귀한 감자였다.
겨우내 따뜻한 아랫목에다 작은 밭을 만들어 정성을 들여 싹을 내서 이른 봄에 파종을 잘하면 ‘하지’ 때에는 걷어 들여 먹을 수 있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의 보리를 보며 이 감자로 `보릿고개’를 넘었다. 울긋불긋 꽃들이 피고 초록빛 잎들은 우리에게 배고픈 철이 다가 왔음을 알렸다. 얼마나 그때는 해가 길었던가!

사람마다 배고픔을 넘긴 세월은 다를 것이다. 이 ‘보릿고개’를 넘는 동안 굶주려 시골 학교에서는 통학 거리가 먼 학생은 걷기가 힘들어 결석을 했고 잠정적으로 휴교도 했다. 혹 도시락을 싸온 학생들은 조금씩 덜어서 점심이 없는 학생들과 나눠 먹곤 했다. 어느 성당에서 사목하던 외국 선교 신부님은 주위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 가서 감자를 얻어서 군 트럭에 싣고 오면 수녀님들이 그 감자를 쪄서 주일 성당에 나온 영양실조로 누렇게 뜬 어린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동족상잔의 전쟁과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런 일들을 겪고 살았다. 종래는 미국으로 부터 잉여 농산물을 무상으로 제공받아 해마다 봄이면 찾아 들던 이 ‘보릿고개’는 없어졌다.


먹을 것이 지천이고 풍족한 물자 속에서 생각만 바뀌면 수없이 찾을 수 있는 감사한 것들... 그 감사에 쌓여 살 건만 행복은커녕 불만과 불화로 괴로움으로 차 있다. 있는 자는 더 가지려 하고, 없는 자는 없는 자 대로 박탈감으로 더 깊어가는 곳. 오늘 날 학교에서 친구가 입고 있는 비싼 명품 잠바를 빼앗기 위해 살인을 마다않는 어린 학생의 의식, 왕따와 학교 폭력 사태가 말해주는 잔혹성과 난폭성은 마음을 섬뜩하게 한다. 수천억의 은행돈을 빼돌린 은행장이 중국으로 밀항 하려다 체포돼 유치장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권력의 실세들이 엄청난 뇌물을 받고 청탁을 받았다가 쇠고랑을 차는가 하면 소위 불교 승려 라는 중들이 호텔방에 모여 술, 담배를 피우며 도박판을 벌린 사진이 뉴스로 나오고 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많아져 오늘의 사회는 개인의 야욕이 더 커졌다.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가고 다 함께 공유해도 축이 나지 않고 생명도 긴 인간 공동의 큰 가치는 작은 가치에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도 우리는 흑인도 만나고, 백인도 만나고 온갖 인종들과 함께 치열한 경쟁을 하며 이 땅에 살고 있다. 어떤 처지에 우리가 놓이더라도 나의 참모습을 지키며 균형있는 삶을 유지하며 용기와 긍지를 가지고 영원히 포기할 수 없는 ‘행복하고 싶다’는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를 지키며 살아야 된다고 믿는다.
오늘 점심상에 껍질 채 찐 붉은 감자가 올라왔다. 하나를 집어 껍질 채 먹어 본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허기진 지난 세월이 떠올려지며 가슴이 뭉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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