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 바다 포구에서

2012-05-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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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태(시인)

포구에서 줄에 묶여 정박해 있는 작은 고깃배, 흔들리지 않으면 배가 아니고 묶여있지 않으면 출항을 준비하는 배가 아니다. 또한 초라하지 않고 비릿내가 나지 않으면 고깃배가 아니다. 잔고기라도 잡지 않으면 천덕꾸러기가 되는 저 작은 고깃배! 내가 해 온 문학이 다 그러하고, 내가 산 인생이 다 그러하다.
기쁨도 흔들리고 슬픔도, 그리움도, 웃음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사랑도 다 흔들리는 고깃배처럼 흔들리게 마련인 인생, 그런 것이 인생인줄 알면서도 삶은 항상 출항 준비를 한다.

인류역사에서 단 한번 시대를 앞서 간 사건을 지적해 본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 회복을 울부짖었던 르네상스였다. 그러나 회복된 인간의 본연과 인간문화의 관리가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현대라고 하는 개념이 무겁고 무한히 커서 현대가 숨차고 빠르게 이루어 가는 산업경제에 무릎을 꿇을 만큼 무력해져서인지 또다시 인간의 본연과 인간문화가 암흑기로 접어들어 가고 있음을 우리는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낙(樂)이 있어야 할 문학(文學)이 무낙(無樂)이 되어 재미도 없고 낙이 없는 문학을 왜 하느냐고 내 스스로 반문할 때가 많다. 본질을 깨닫지 않고는 성립이 되는 않는 문학을 이런 현실에서 계속한다는 것이 자칫 도피의 변명행위가 아닌가, 내 스스로 반문할 때가 많다.


문학이 시대감각을 앞질러 가면서 작품을 생산해 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간 의식만은 시대감각에 퇴색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고 고집하면서 걸어온 문학 인생이었다. 그런 험난한 파도를 헤치며 저 작은 고깃배가 무엇을 얼마나 잡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갈 수 있을는지 문학이 겪고 가는 여윈 얼굴이 창백하고 초라하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그 예술로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생활을 대변할 수 없는 문학에 무슨 매력이 있다고 시인입네, 수필가네, 하면서 그것이 무슨 벼슬이나 되는 것처럼 먹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광고에도 써먹는다. 한국에서는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아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런 광고를 볼 때마다 나는 얼굴이 뜨끈해지고 부끄러워진다. 문학은 벼슬이 아니고 월계관을 씌어주는 도구도, 화장품도 아니다. 만물의 본질과 인간 탐구를 위한 감추어진 호미 정도일 뿐이다.

장사를 해도 망하지 않으면 이문은 생기는 법이라서 초대된 성악가는 노래 값에 대한 사례를 받고, 화가는 그림을 팔아 이문을 챙기는데, 몇 푼도 되지 않는 원고료를 받기는커녕 거액(?)의 자비를 들여 읽어주지도 않는 책을 출간해 혼자서 좋아하는 문학 인구들. 그래도 내가 사는 그동안에 나에게 생긴 작은 이문이 어떤 이문인가 손꼽아보면 어렵사리 쓴 시와 세상을 둘러보며 쓴 수필뿐이다. 이제 청춘은 다 가고 점점 나이만 들고 보니 객사(客舍)로 잠시 놀러 왔다가 종가(宗家)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 오후 시간에 따스한 햇볕만을 그동안 시렸던 등짝에 더 많이 쪼이고 싶어서 뒤뜰에 나가 앉아 하늘에 등짝을 맡기고 흐르는 구름을 바라 볼 때가 많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을 정리하며 쓰다가 시학에 앞서 중요한 것이 본질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그 유명한 본질론을 써냈다. 예술가의 존경은 본질을 찾아가는 그 상상력에 있는데 산업경제에 쫓기어 앉을 자리가 없어진 탓인지, 문학의 정체를 잘못 알고 있는 탓인지 문도들에게 찾아 볼 수 없는 상상력, 이름만 달고 다니는 가엾은 문도들의 광대 같은 행렬을 보고 사람들은 그저 웃기만 한다. 청소부의 두꺼운 장갑 같은 그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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