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날은 간다

2012-04-2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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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겨울이 간 듯 만 듯 하더니 요즘은 정말로 봄이 왔다. 지난주부터 화사한 날들이 계속되면서 집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밖으로 뛰쳐나온 듯 공원이나 거리나 사람들로 가득 하다.지난 5일 한식(寒食)이 지난 주말에 집에서 한시간 이상 거리인 롱아일랜드 워싱턴 메모리얼 팍으로 성묘를 갔더니 그곳에도 봄은 한창이었다. 커다란 벚꽃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하르르 꽃잎이 떨어지는 한가로운 풍경 속에 죽음들이 평화로이 누워있었다. 말끔하게 정돈된 푸른 잔디 위로 바람결 따라 날아와 소복이 쌓인 꽃잎들은 분홍색 띠를 이루고 있었다. ‘연분홍 꽃잎이 봄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낯익은 노래가 귓전에 들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6.25전쟁 후인 1954년 유니버설 레코드사를 통해 나온 백설희의 노래 ‘봄날은 간다’는 당시에도 시집살이와 세파에 시달린 수많은 여인들의 가슴을 울렸지만 현재에도 많은 이의 가슴을 적시고 있다.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의 이 노래는 효도잔치에나 어울릴 것 같지만 2004년 ‘시인세계’가 젊은 시인부터 원로시인까지 시인 100명이 좋아하는 가요설문조사에서 1등을 차지할 정도로 노랫말이 좋다.

날씨가 화사하고 밝은데 미풍까지 불어대니 가슴속 깊이 묻어둔 그리움, 한 같은 것이 막 터져 나올 것 같고, 무심하게 흐르는 세월 속에 왜 이리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것인지, 그래도 뭐 같은 인간사와 상관없이 무심한 자연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래서 그 담담함이 더욱 슬픈 노래다. 뉴욕에 봄이 오면서 결혼식, 금혼식, 병문안 등 여러 곳을 다녀왔다. 한겨울동안 막혀 있다가 봇물이 터진 듯 줄줄이 행사가 이어졌다. 래 혼자 살던 후배가 좋은 사람을 만나 면사포를 썼고 한국과 뉴욕에서 두 조카가 같은 날 각각 결혼했으며 존경하는 선배부부가 사모관대와 족두리 차림으로 결혼 50주년 기념 잔치를 했다. 최측근 지인으로 암 수술을 한 이, 한창 투병 중인 이, 오늘 내일 하며 생명줄을 붙잡고 있는 이도 있다. 4년 만에 돌아온 윤달을 맞아 양력 4월 21일부터 5월 20일까지는 한국의 부모님 묘소를 뉴욕으로 모셔 와야 한다며 경비와 시간으로 고민하는 이도 있다.


주위를 가만히 살펴보면 걱정거리 없는 이가 없다. 나이가 들면서 몸 어딘가 하나는 고장 난 사람, 한 움큼의 약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 자식 농사 망쳤다고 한탄 하는 사람, 20년간 정다운 이웃이 어느 날 이혼 후 한사람은 뉴욕에 남고 한사람은 한국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잘나가던 비즈니스가 문 닫으면서 집이 차압당하고 생활비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장사가 안돼, 인건비도 안나와” 하면서도 단내가 나도록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이런 저런 주위의 갖가지 사연들이 산처럼, 강처럼 넘쳐나고 있다. 묘소에 올 때마다 아는 사람의 비석이 자꾸 늘어나는 것처럼 이민 연수가 쌓일수록 세상을 떠나는 지인도 하나, 둘 늘어나고 있다. 점차 결혼식보다는 장례식 가는 횟수가 더 많아질 것이다.

축하할 곳, 들여다 볼 곳, 위로해줄 곳이 많았던 봄날을 보내며 쉽게 살거나, 그저 사는 삶은 어디에도 없구나 싶다. 묘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들린 선킨 메도우 바닷가에는 다사로운 햇살아래 모래사장에 누워 선탠 하는 이, 아빠와 아이들이 어울려 연 날리는 가족, 해변을 걷는 이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 공원길을 따라 조깅하는 이, 자전거를 타는 이, 천천히 산책하는 이, 저마다 건강을 위하여 열심히 운동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애환 어린 이민사 속에 계절은 때가 되면 왔다가 가고 다시 온다. 꽃은 제 스스로 알아서 피고
진다. 아무리 ‘세월아 빨리 흘러라’ 해도, 또 ‘천천히 가라’ 해도 모든 이에게 똑같이 젊음은 간다,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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