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금을 깎으면 죽음을 달라”

2012-04-1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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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자(의사)
프랑스의 베르사유(Versailes)행진은 시민혁명의 불꽃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서곡이 울리는 1789년, 식량난으로 굶주린 7,000명의 주부들이 파리 광장에 모여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외치면서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6시간을 걸어 베르사유 궁전까지 행진하여 세상을 뒤집어 놓았다.

21세기. 고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지구촌은 노인들의 ”연금을 삭감하면 죽음을 달라” 라는 비명소리가 들려온다. 지난 주에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77세의 노인이 권총으로 머리를 관통해 목숨을 끊어 충격을 주고 있다. 그리스 정부의 가혹하게 밀어붙이는 연금 삭감에 대한 분노의 불길이다. 연금은 노인들의 생존의 마지막 실탄무기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아테네 광장은 돌과 화염병으로 투석전을 벌리며 긴축재정을 반대하는 시위대와 이를 막는 경찰과의 싸움으로 늘 최루탄 연기로 자욱하다. 고색이 창연한 아테네 광장은 분노의 용광로처럼 끓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의 벼랑 끝의 재정위기를 돕는 유럽국가들이 그리스 시위대를 바라보는 눈은 싸늘하다. 그리스의 연급제도는 유럽에서 가장 관대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는 싼 이자로 국제시장에 돈을 끌어다 사회보장기금의 적자를 메우고 복지정책으로 민심을 달랬다. 그리스는 35년만 일하면 연금을 탈수 있고 액수는 임금소득의 95%가 넘는다. 극적인 죽음을 택한 그리스 노인도 지난 20년간 연금을 탔으니 57세부터 연금을 탄 것이다. 아직 왕성하게 현직에서 일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리스의 빚은 눈 덩어리처럼 불어나고 파산직전에 이르렀다.
인류문명의 요람지인 그리스는 세계에서 가장 신용등급이 낮은 국가로 추락했다. 지금 미국 사회보장제도의 꽃인 소셜 시큐리티도 흔들리고 있다. 미국도 사회보장기금이 바닥이 날 것이라는 위기감으로 미래가 불투명하다. 어느 햇살이 맑은 오후 이웃집 이탈리계 노인이 놀러 와 함께 녹차를 마셨다. 아직도 단단한 근육과 체력을 자랑하는 퇴역군인이다.

미국에서는 세대차이를 구분하는 표현의 용어가 있다. 트위터로 오바마 대통령의 투표율을 끌어올린 밀레니엄 세대(1982-2000년 출생) 맞벌이 부부와 이혼 부부에서 자란 자유분방한 X세대(1965-1981) 샌드위치처럼 끼어있는 베이붐 시대(1946-1964), 그리고 침묵의 시대 (1946년 이전 출생)로 구분된다. 이웃집 노인은 차를 마시며 봇물이 쏟아지듯이 이야기를 쏟아낸다.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미군들은 히피문화의 충격에 빠진다. 그러나 그는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온몸을 던져 열심히 일하고 저축했다. 그는 지금은 채권이나 주식에 장기투자를 했고 부동산의 임대수입으로 여유롭게 살아가고 있다. 그의 걱정거리는 뚱뚱한 아내의 콜레스테롤 수치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노후의 여유를 즐기는 노인이 얼마나 될까?

미국에서도 그리스에서 연금과 목숨을 바꾼 노인의 극적인 죽음을 강 건너 물처럼 바라볼 수만 있을까? 그가 공개권총자살을 하면서 남긴 “품위있는 노후를 보내지 못하고 먹을 것을 찾아 쓰레기를 뒤지느니 차라리 죽겠다” 라는 유언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처럼 허공에 흩어져 버렸다. 왜냐하면 새 싻이 움트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황 속의 황폐한 죽음이다. 노인은 “연금을 깎으면 죽음을 달라” 라고 절규하며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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