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495 v 516

2012-03-24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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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재옥(의사)

롱아일랜드를 가로지르는 495도로(LIE)는 516경부선고속도로(KTX)와 서로 비슷한 점이 많다. 옛날 부산에서 서울까지 과거시험 보러 걸어서 올라갈 때는 한달이상 걸렸는데 지금은 KTX가 2시간대로 앞당겨지고 있다. 사실 롱아일랜드 반도 끝까지 가는 시간이 경부선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린다. 내 직장은 브루클린에 있다. 새벽같이 뉴저지에서 GW다리를 건너 지하철을 갈아타고 직장까지 도착하는데 2시간쯤 소요된다. 퇴근때는 지하철이 뜸하기 때문에 시간이 조금 더 걸린다. 따지고 보면 나는 매일 서울에서 부산까지 출퇴근하는 셈이다.

내가 처음에 미국에 왔을 때 유대교 랍비는 나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해주었다. 너 어디서 왔느냐, 너 나이가 몇이냐, 너 종교가 무엇이냐, 이 세 가지는 절대로 상대방에게 묻지 말라고 했다. 뉴욕에 오래 살려면 꼭 지켜야 할 철칙이라고 했다. 그만큼 평생 가꾸어 온 개인의 자존심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495는 한쪽은 드넓은 대서양, 한쪽은 평화스런 내지로 단순한 지리학적 의미밖에 없는데 비해 516도로는 불필요한 인위적인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한민족을 동과 서로 갈라놓고 서로 반목, 질시하게 만들어 놓았다. 성골, 진골 등 뼈다귀에 산신령을 부각시키는가 하면 백제인, 신라인 등 태고적 나라이름까지 들먹이다 못해 나중에는 욕지거리로 이어진다.

하기사 그 당시 지성인들의 집합체였던 그 비좁은 한양 성 문안에서까지 벼슬아치들은 동서남북 노론 소론을 따지면서 피터지게 치고 박고 살았으니 말이다.
요즘 산모들의 분만은 대부분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더러는 미국 국적을 취득하려고 힘든 몸을 이끌고 미국까지 강행군하는 산모들도 적지 않다. 시골에는 산부인과 소아과가 없어진지 이미 오래다. 그나마 출산율까지 낮아져 앞으로는 일손이 많이 딸릴 것 같다. 출생지는 모두 서울특별시로 기록되어 있다. 다 한 고향 사람들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을 아예 서울공화국으로 개명해야 할 것 같다.

지하철 앞 벽에는 멋진 리본을 단 예쁜 개 한 마리 사진이 붙어있고 “이 개는 뉴욕 태생입니까?” 하며 빨리 출생지를 신고하라고 쓰여 있다. 그 밑에는 치부를 드러내는 남루한 누더기를 뒤집어 쓴 거지가 누워 있다. 개만도 못한 사람, 개 팔자가 오히려 상팔자다. 플러싱에는 한국거지도 가끔 눈에 띤다. 아무도 동서를 따지려드는 사람이 없고 자기 일에 몰두해서 남의 일엔 아예 관심도 없다. 이제는 미국태생, 서울태생, 성골, 진골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오직 가진 자와 못가진 자와의 양극현상만이 두드러지게 더욱 더 부각되어 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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