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밥값

2012-02-1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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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한국사람들은 밥심으로 산다, ‘금강산도 식후경’, ‘밥이 보약’이란 말들이 있다. 수천년간 쌀을 주식으로 해온 한국인들에게 밥은 육신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한편 영혼의 허기까지 채워준다.미국에 살면서 밥 외에 빵이나 다른 음식을 많이 먹지만 그래도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밥 한공기’의 매혹은 뿌리치기 힘들다. 오랫동안 못만난 사람과 통화하면서 ‘시간나면 밥 한번 먹
자’ 하게 되고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밥을 같이 먹게 되면 부쩍 친해진 것 같다. ‘먹은 입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오해가 빚은 서먹한 사이도 밥을 함께 먹으면 풀어지기도 한다.

연말연시와 겨울방학 동안 뉴욕 한인들은 손님을 많이 맞았을 것이다. 한국 혹은 타주에서 친지나 친구, 선후배가 뉴욕을 방문하면 ‘아무리 바빠도 밥 한끼 먹여 보내야지’ 하는 마음은 다들 기본으로 갖고 있다. 미국에서 오래 산 사람일수록 정이 앞서는 보수적 사고방식으로 손님 대접을 하려 한다. 대도시 뉴욕에 살다보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젊은이들은 ‘뉴욕 안 가보면 대화가 안 통해’ 하고 오고 노인들은 ‘죽기 전에 뉴욕 구경 한번 해야지’ 하고 온다.


그런데 요즘 잘 사는 한국인들이 많다보니 뉴욕에서 웬만큼 비즈니스에 성공하지 않고서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부자이다. 그런데 옆에서 보면 부자인 한국이나 다른 주에서 온 사람보다 가난한 뉴욕 한인들이 주로 밥값을 내고 있다. 뉴욕한인들이 모여 한국이나 타주 손님치레 이야기를 하면 밤새워 수다를 떨어도 끝이 없을 정도로 대화가 무궁무진하다. 그 중 한 이야기다.

“수십년 만에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났지. 나만 뉴욕이고 캐나다, LA, 텍사스, 필라에서 모두 다섯명이 뉴욕에 모였어. 다들 뉴욕에 가족이나 친척, 아이가 유학 중이라 우연히 연락이 되어 한자리에 모였는데 한번 보게되니 자주 모이게 되었어. 처음엔 우리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했고 그다음부터는 식당에서 모였는데 두 번째는 뉴욕 사는 내가, 세 번 째는 남편이 밥값을 냈지.
네번째는 친구 한명이 나눠내자며 지갑을 열더니 달랑 자기네 부부 밥값 이십불을 내는거야, 됐다 하고는 또 내가 냈지”

내가 알기로 그 친구는 별로 부자가 아니다. 그저 부부가 성실한 노동의 댓가로 주급 받고 사는 사람들이다. 반면 친구들은 안정된 비즈니스에, 조기은퇴 후 여행 중이거나 사는 곳에 빌딩을 여러 채 갖고 뉴욕에 투자할 곳을 찾고 있는 중으로 다들 형편이 좋다. 그냥 그 친구는 계산대에서 미적거리는 것도 자존심 상하고 고작 밥값 계산에 한두푼씩 모으는 것도 보기 싫어 뉴욕에 산다는 이유 하나로 줄기차게 부담을 떠안고 있다는 것이다.뉴욕 한인들에게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세계 최고의 도시 뉴욕에 왔으니 뮤지컬을 하나 보아야 하고 기념품도 사가야지 하는 그들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주느라고 한 달 벌어 한 달 먹고 사는 뉴요커들은 그들이 오고간 뒤 적자 가계부를 메꾸느라고 허덕인다. 얼마전 그 친구는 다시 전화를 해왔다.“뉴욕 사는 또래 8명을 만났는데 밥값 총액을 8로 나누어 정확하게 내고 커피 마시러 가서는 또 8로 나누어 각자 3불씩 냈어. 각자 지갑 열어 돈을 모으는 것이 종업원 보기에 민망했지만 난 이 친목계 마음에 들어, 계속 나가야 할 것같아” 하고 히히 웃었다.

쫀쫀하게 밥값 갖고 수십년 우정을 저울질 하겠냐마는 너무 염치없는 손님은 곤란하다. 뉴욕 사는 사람이 모든 부담 지는 것을 당연시 하는 친구가 사는 곳에 그 친구가 방문하겠는가, 아마 서울이고 LA고 가더라도 그 친구 만날 생각이 없거나 자기가 당한 민폐를 답습시키지는 않을 것이다.암만 봐도 뉴욕한인들이 세계적 도시에 살아서 그런지 다른 곳에서 온 손님보다 씀씀이도, 마
음도 더 크고 넉넉한 것같다. 여러모로 더 부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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