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것 지키기

2012-01-1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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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

얼마 전 한국 TV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막을 내렸다. 이정명의 역사추리소설 ‘뿌리깊은 나무’를 원작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한국은 물론 뉴욕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과정을 다룬 이 드라마는 욕쟁이 왕과 밀본을 중심으로 한 반란세력, 집현전 학사 연쇄살인, 이를 해결하려는 노비출신 겸사복 채윤과 왕의 호위무관 무휼, 어릴적 충격으로 말을 잃은 천재소녀 소이 등 다양한 인물이 서로 얽힌 미스터리 스릴러다.

조선 제4대 임금 세종(1418~1450)이 창제하여 세종 28년인 1446년 ‘훈민정음(訓民正音: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 반포된 지 올해로 566주년이 된다.이 세상에는 약 3,000개의 언어가 있고 400개의 문자가 있다. 지구상의 사람들이 쓰는 언어의 75퍼센트가 문자가 없는데 우리는 세종대왕 덕분에 우리가 쓰는 말을 그대로 옮긴 문자를 갖고 있다.‘아야어여오요우유으이’ 하는 소리를 내본다. 목과 입술 모양대로 소리가 난다. 그 시절에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독창적 아이디어가 참으로 놀랍다.


더구나 자음 14자, 모음 10자 불과 24자(창제 당시 28자) 에 모든 뜻과 소리를 담아내다니 실로 엄청나고 역사를 바꿀 만큼 위대한 문자인 것이다.사실 어린 시절 한글공부를 따로 한 기억이 없다. 초등학교 담임선생이 칠판에 써놓고 읽어주는 철수와 영이, 바둑이가 나오는 문장을 몇 번 따라 읽으면서 저절로 읽고 쓰게 되었던 것같다. 글이 늘 사용해오던 말이었기 때문이다.만일 한글이 발명되지 않았더라면 5만자나 되는 한자를 외우고 쓰느라 그야말로 생고생을 하였을 것이다. 모든 한국인들이 중국어와 일어, 영어가 혼용되는 어쩡쩡한 잡탕 문화 속에 정신적으로 강대국의 식민지하에서 우왕좌왕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한류, 최근 들어서는 한국어 가사로 된 K-팝 열풍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의 문명은 문자에 의해 계승, 발전된다고 할 때 우리가 문화민족임은 우리 고유의 한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지금 우리들은 미국에 살고 있지만 모국을 완전히 떠나서 살지는 않는다. 종종 한국도 가고 한국 뉴스도 듣고 한국신문도 본다. 이민 1세 가정은 집에서 한국말을 쓰고 자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에게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편하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한인 학부모들은 주말마다 교회나 단체, 사설기관의 한국학교에 보내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친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아는데 한글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어로 말하고 글 쓰는데 익숙한 2세들이 늘고 있다.

작년 연말 미동부한국문인협회 뉴욕문학 출판기념회에서 미고교 한글백일장 입상자 시상식이 있었다. 베이사이드, 프랜시스, 뉴저지 팰팍 고등학교의 모국어반 학생 150여명이 한글로 ‘나는 누구인가’ 와 ‘사이버 월드’를 주제로 시와 산문을 썼던 것이다. 미국에서 학교에 다니며 모국어를 잊지 않는 것도 기특한데 글을 쓴다니, 장한 일이었다. 백일장 관계자는 이들에게 주는 상금이 ‘말로 표현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작은 금액’이라고 했다. 알고 보니 각 학교 1, 2, 3등, 장려상 수상자 등 40여명의 학생에게 주는 상금 총액수가 불과 1,350달러.정부기관이나 단체의 후원 없이 본협회의 기금만으로 충당하는데, 한인사회 다른 장학금의 한 개인이 받을만한 금액을 이리 나누고 저리 쪼개어 이들을 격려하고 있는 것이다. ‘상금이 중요한 게 아니다’고 말하지 말기를, 마치 한글이 푸대접 받는 듯한 기분이 들지 않는가.

한글은 우리 것이기에, 우리 가까이 있기에 오히려 소홀한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미국에서든 한국에서든 한글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잘 알기 위해서는 더더욱 한글을 대우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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