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인의 멋

2012-01-09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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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효섭 (아동문학가/목사)

동양인의 정서와 서양인의 정서는 매우 다르다. 대만이 낳은 신학자 송천성 박사(C. S. Song)는 동양인의 공통점을 ‘울림’ 속에서 찾는다. 그는 중국 일본 한국의 고전시를 분석하고 그 모두가 ‘울림’을 시의 감각으로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아리랑’에서 열 두 고개 중 마지막 고개를 오르는 지친 나그네의 발걸음 소리는 한(恨) 많은 동양인만이 이해할 수 있는 ‘울림’(Echo)이라고 해석하였다.

송 박사는 일본의 정형시 ‘하이꾸’(排句) 시인인 바쇼오(芭蕉)를 연구하였다. 바쇼오 시인은 울림을 어떻게 시 언어로 옮기느냐 하는 것을 그의 문학 과제로 삼았다고 한다. 바쇼오의 하이꾸에 이런 것이 있다. ‘해 묵은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물방울 소리’ 이 시에는 고요를 깨는 움직임, 그 깨뜨림이 있었기 때문에 더 깊은 고요를 의식하는 종교적 울림이 있다.


한국적인 것(Koreaness)이 도대체 무어냐고 묻는 2세들이 많은데 ‘울림’이 바로 한국의 멋 중의 하나이다. 퉁소, 가야금, 장구 등은 모두 울림을 주로 한 악기들이다. 이 악기들이 본음도 중요하지만 여음을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는 울림의 맛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하기야 서양 음악가로서도 바흐 같은 악성(樂聖)은 “음과 음 사이에 대한 처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함으로써 울림의 중요성을 인정했지만 음과 음을 연결하는 울림이란 인간관계로 말하면 역시 한국적인 것으로 지적되는 정(情)이다.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고개’처럼 낯선 나그네에게 막걸리 한 잔이라도 먹여 쉬어가게 하는 정으로 한국인과 한국사회는 구성되어 있다.

지금은 물질문명과 개인주의의 물결, 그리고 정치풍토의 경화(硬化)로 한국적인 울림이 많이 훼손되어 있지만 그래도 회사나 교회나 이웃에서 이 ‘울림’이 중요한 유대관계가 되어있고, “정일랑 두지 말라”고 노래하면서도 여시 한국인의 사랑은 계산보다 정이 앞서가고 가정이나 사회가 울림으로 맺어진다. 오동에 듣는 빗발 무심이 듣건마는/시름이 하니 잎잎이 수성(愁聲)이로다/이후야 잎 넓은 나무를 심글줄이 있으랴/ 우리 조상의 이 옛시조는 한국인의 울림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오동잎에 빗발 퉁기는 울림이 걱정 많은 시인의 수심을 자극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나무 잎이 오동잎처럼 넓은 것은 아니니까 다음번에는 작은 잎사귀의 나무를 심어 빗줄기의 애가(哀歌)를 바꾸어 보겠다는 끈질김이 한국인의 멋이다.

시조 한편을 더 감상해 보자. 잘 새는 날아들고 새 달이 돋아온다/외나무다리를 홀로 가는 저 선사야/네 절이 얼마나 하관데 원종성이 들리나니/마치 밀레의 명화 ‘만종’을 보는 것 같다. 소리와 한 폭의 동양화와 문학이 한꺼번에 감상되는 명작이다. 깊은 산 속 땅거미가 내려앉고, 새들이 잠자리를 향하여 재잘거리며 날고 있다. ‘외나무다리’는 계곡과 거기에서 울려오는 시냇물소리를 담고 있다. 그 노을 속을 중이 걷는다. 그 때 절간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이 풍경을 감싸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은 멀다. 그러나 이 중은 피곤하지 않다. 시냇물과 새들과 종소리가 주는 평화의 울림 속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이
런 정서가 한국인의 멋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한국인의 멋인 ‘울림’을 깨는 것이 있다. 그것이 지연(地緣) 찾고 학연(學緣) 찾는 버릇이다. 손 바닥만한 땅에서 출신 도(道)를 찾고 동창을 밀어주고, 게다가 군벌, 재벌, 정벌, 등의 울타리를 만들어 아름다운 울림을 인위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민족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버릇이다.
한국 땅덩이를 미시건 호수에 던지면 꼭 맞게 들어앉는다는 작은 마을민족인데 넓은 미국에까지 와서 출신도 찾고 출신 학교 따져서야 되겠는가! 한국인이 대륙에 이민 온 역사적인 의미가 이런 데에도 있다. 통 큰 사람이 되어 편 가르기, 담 쌓기, 끼리끼리 병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후세에 울림의 정신적 유산을 물려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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