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교회의 정치참여, 두 가지 유형

2011-12-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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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와 60년대, 흑인교회들이 이끌었던 공민권 운동은 그것이 정치참여 운동이었지만 권력을 목표로 하지 않았고 사회의 도덕적 변화를 추구했다. 교회들이 영적인 힘으로 움직였고 신앙인의 도덕적 영향력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이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마틴 루터 킹’목사는 신앙과 정치를 찰떡같이 결합시켰지만 정치권력이 철저하게 영적·도덕적 권위의 영향을 받도록 했다. 킹 목사의 도덕적 가치에 우선하는 어떠한 정치 아젠다도 없었다.

그는 앞날을 예견하는 종교적 예언자가 아니었고 신앙적 양심에 따라 현실의 진실을 외치는 선지자였다. 그로 인해서 기독교의 가치가 올라갔고 기독교에 대한 사회의 기대가 한껏 높아졌다.


킹 목사로 대변되는 이때의 기독교 사회운동은 ‘기독교국가’라는 미국의 종교적 전통을 빛나게 했다. 그 어느 기독교 목사도 백악관의 조찬기도회에 들어가려고 아우성치지 않았고 그 어느 권력자도 신앙 때문에 전쟁을 한다고 하지 않았다. 기독교 운동이 사회변화의 주류를 이루었지만 기독교 신앙을 사적인 영역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정치권력을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었고 작고 큰 교회의 평신도들이 전면에 나서서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외친 운동이었다.

1980년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수많은 기독교 보수 복음주의자가 환호했다. 전체 공중파 방송들이 레이건 승리의 주역으로 기독교 우파를 소개하자 기독교 우파 지도자들의 마음은 자긍심으로 부풀어 올랐다.

레이건 캠페인에 가담한 기독교 우파의 수장격인 ‘제리 폴웰’ 목사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자유침례교신학대학(Liberty Baptist College)에서 선거승리 축하 행사를 열었다.

선거의 승리에 도취한 기독교 우파 목사들이 펄쩍펄쩍 뛰면서 강당을 가득 메웠고, 연단에 ‘제리 풀웰’ 목사가 등장하자 악단은 ‘대통령찬가’를 연주하기도 했다.

1920년대 그 악명 높은 스코프스 재판(1925년 테네시주의 고등학교 생물교사인 ‘존 스코프스’가 성경의 천지창조론을 가르치도록 된 주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가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 일명 ‘원숭이 재판’이라고도 한다)이후 오랫동안 미국 사회의 변방에서 무시와 조롱을 당했던 기독교 보수 복음주의자들은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방법을 동원해서 백악관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갔다.

‘제리 풀웰’목사가 (주로 남부지역)기독교 우파를 정치 세력화하여 레이건을 힘껏 밀어 주었던 것이다. 한 달에 두서너 번 대통령의 머리를 숙이도록 하
고 기도로만 아젠다를 주문했지 오히려 ‘지미 카터’때로부터 도덕적 아젠다는 후퇴하고 말았다.


‘제리 폴웰’목사로 대변되는 기독교 보수 복음주의 정치운동은 정치적인 힘을 쫓는데 급급했다. 그들은 신앙운동을 통해서 가치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당장의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목표였다.

공화당에 영향력을 행사해서 법을 개정할 생각을 했을 뿐이지 도덕적 주장을 통해서 국민들로부터 지지기반을 만들지 못했다. 종교 우파의 덕분에 권력을 쟁취한 공화당은 보수 복음주의자들에게 도덕적 알맹이를 주지 않고 미사여구로 그들을 달래기만 했다.

본격적인 대선전이다. 정치라는 영역과 거리가 멀수록 그것을 자랑같이 여기는 풍조는 분명 무지의 소치다. 특히 한인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경향이 있다.

미국은 종교단체가 지지하고 실제로 주도하는 진보적 명분과 신앙운동의 긴 역사를 가졌다. 노예제도폐지, 여성참정권, 소수계공민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신앙인의 정치참여로 이루어져왔다. 신앙인의 올바른 정치참여가 무엇인지 역사를 통해서 배워야 한다.

김동석(한인유권자센터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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