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반갑다, 친구야

2011-12-16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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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논설위원)

연말은 연말인가 보다. 한인사회 연회장마다 연말모임이 줄을 잇는데 그 중 중·고교 및 대학동문회의 송년파티가 열기를 띄고 있다. 선후배와 동기동창이 모여 교가를 부르고 와인 잔 들고 희망찬 새해를 기원하면서 학창시절 추억을 나누고 있다. 동문회 모임은 힘든 이민생활에서 서로간 용기를 주고 새로운 힘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추억을 공유하고 함께 늙어가는 동문들은 오랜만에 만나 ‘야, 반갑다, 너도 늙어가는구나’ 함과 동시에 ‘그새 일년이 흘렀네’ 하게 된다.

젊은 사람보다는 대체로 나이가 지긋한 동문들이 많이 모이는 경향이 있고 호기를 부려도 되는 자리인지라 너도나도 큰소리 쳐보고 마이크 잡고 ‘나도 가수다’가 되기도 한다. 지난 11월, 영화 ‘겨울여자’ 속 장미희의 남자 김추련이 숨진 채로 발견된 적이 있었다. ‘겨울여자’를 통해 부상한 그는 70~80년대를 풍미한 청춘스타였다. 그 시절 청춘을 보낸 세대에게는 잊지 못할 배우이다. 요즘 동문회 연말모임에 오는 세대들은 대체로 ‘겨울여자’와 ‘별들의 고향’, 그 영화들 속에 나오는 ‘눈물로 쓴 편지’,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나는 열아홉살이에요’ 같은 노래들을 안다.


1977년 조해일 연재소설 ‘겨울여자’가 김호선 감독에 의해 영화로 개봉된 날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 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긴 생머리를 한 여주인공 장미희를 따라 너도 나도 긴 생머리를 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고 첫사랑과 자유연애에 관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또 1974년 개봉된 영화 ‘별들의 고향’도 있다. 최인호 연재소설을 이장호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그 이후 대학가 방송제마다 경아와 문오의 대사로 인기를 끌었다. “경아, 오랜만에 누워
보는 군”, “행복해요” 하는 대사를 리바이벌 하면 학생들은 폭소와 환호를 보내었다.이들 영화는 통속 멜로임에도 장안의 최대화제가 되었고 나이든 이민 1세대 기억 속에는 겨울 찬바람 속에 겨울여자가, 눈내린 아침에 별들의 고향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시절, 학교 앞 다방 한구석에 뮤직 박스가 있었다. 내부가 훤히 보이는 유리 칸막이 안에서는 장발의 디 제이가 수시로 판을 갈아대며 포크 송을 들려주었다.뮤직 박스에서는 나나 무스꾸리의 사랑의 기쁨, 엘비스 프레슬리의 예스터 데이, 비틀스의 헤이 주드, 멜라니 사프카의 새디스트 싱, 패티 페이지의 체인징 파트너, 트윈폴리오의 번안가요들이 종일 쏟아져 나왔었다.
라나 에 로스포, 뚜아에 모아, 어니언스, 한대수, 서유석, 김민기, 양희은, 송창식, 윤형주 등 한국통기타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도 질세라 방송을 탔고 수련회나 MT에서 이들의 노래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다들 가난하던 시절이라 값비싼 오디오를 가진 사람이 거의 없어 웬만한 대학생들은 다방 홀 한쪽 구석에 있는 뮤직 박스를 적극 애용했다.

듣고 싶은 노래의 가수와 제목을 적은 쪽지를 공손하게 뮤직 박스 밑에 타원으로 뚫린 구멍으로 밀어 넣으면 안에 있는 디 제이가 곡이 담긴 커다란 LP판을 찾아서 먼지를 열심히 닦았다. 둥글고 검게 반짝이는 음반의 먼지를 벨벳 먼지털이로 말끔히 닦아낸 다음 턴 테이블에 제대로 놓였나 조심스레 보면서 위에 얹고 바늘을 살짝 가져가는 그 태도는 경건, 엄숙 했다. 또한 가수 박인희의 토크송을 통해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가 나오면 다들 열광했다.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참으로 많은 세월이 갔고 어느새 30년이 넘었다.연일 나오는 대학동문회 연말 모임 뉴스에서 히끗거리는 머리와 주름진 얼굴을 한 참석자들의 사진을 보면서 그 시절을, 깃든 노래들을 추억해 봤다. 참으로 사는 게 뭘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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