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뿌리깊은 나무

2011-12-14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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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영(주필)

자고로 전쟁에서 이긴 나라는 진 나라의 문화유산을 말살하는 것이 패턴이었다. 그렇게 하면 패전국은 말 그대로 껍데기만 남아 자연스럽게 승전국에 동화된다. 마찬가지로,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면 그 나라 국민들에게 지배국의 말부터 사용하게 하고 이름도 자기네 스타일로 바꾸도록 한다. 그러면 속국 국민의 얼과 혼은 저절로 단절된다.옛날 유럽과 중동, 북부 아프리카를 석권한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은 점령지 국민들에게 희랍어를 사용하도록 억압하며 헬레니즘 문화를 전파시켰다. 중남미를 식민지로 만든 스페인과 포르투갈도 원주민들에게 자국어를 강요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오늘날 ‘히스패닉’으로 불리는 복잡한 인종을 만들어냈다.

한국도 오랜 역사를 통해 중국의 지배를 받으며 고유의 문화유산을 훼손당했다. 오늘날까지도 한자문화는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다. 더구나 일제시대 36년간은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고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요당했다. 해방 이후 성씨는 회복했지만 아직도 우리 주위엔 자(子)가 들어 있는 일본식 이름을 가진 한인 여자들이 많다.역사학자들은 말한다. “역사란 죽은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 살아있다”고. 그래서 각 나라의
역사는 그 나라의 모든 문화를 담고 있다. 한 나라의 문화유산에는 조상이 걸어온 삶의 발자취가 모두 담겨있다. 민족의 숨결이자 뿌리인 문화유산을 계속 보존하고 후세에 전해주는 것은 당대 사람들의 책임이다. 뿌리가 없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 여러 나라들이 조상전래의 뿌리를 보존 계승하고 다른 나라에 탈취당한 문화유산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주 한국에 경사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 약탈당한 조선왕실의궤 등 도서 1,200책이 강제반출 100여년만에 고국 품에 안겼다. 지난 6일 일본에서 인천공항에 도착한 이 책들은 환영의전 및 안착식을 거쳐 곧바로 경복궁 국립 고궁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됐다. 문화유산의 중요성은 우리 같은 이민자들에겐 더욱 절실하다. 1세들이 제대로 살아남고 발전하기 위한 최상의 길은 고유의 문화유산을 통해 민족의 얼을 되살리면서 후세를 위한 이민사회의 초석이 되는 것이다. 2세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선조의 역사를 모른다면 뿌리 없는 이방인의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1세들은 초기 이민세대가 어떻게 미국 땅에 정착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고난을 겪었으며, 그 고난을 어떻게 극복하고 발전해 왔는지에 관해 2세들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미국의 유대인과 흑인을 대상으로 연구한 골든과 에릭슨의 보고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노예로 끌려와 미국 사회에 동화한 흑인은 아프리카의 전통문화와 정체성을 거의 상실했으며 결과적으로 자긍심을 갖지 못하고 집단의 결집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반면 전통문화를 지키면서 미국 사회에 동화한 유대인은 주류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출했을 뿐 아니라 수 천년간 전 세계를 유랑하면서도 오늘날 미국은 물론 세계의 지도자 위치에 우뚝 섰다. 그것은 그들이 자국민들에 역사, 문화, 언어 등을 망라한 뿌리의식, 곧 민족관념을 유난스러울 만큼 열심히 가르친 교육의 힘이 근간이 됐다고 했다.최근 한인사회에도 2세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한국역사문화연구위원회가 발족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2세들의 주류사회 진출을 돕는 교두보를 확보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2세들이 뿌리의식으로 확고하게 무장하고 미국 내 다양한 문화와 샐러드 볼처럼 조화를 이룰 때 미국 속의
‘코리안 아메리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위원회의 취지에 100% 동감한다.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도 용비어천가에서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움직이지 않아 꽃이 좋고 열매가 많으며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않고 내가 되어 바다에 이른다”고 노래했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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