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

2011-12-09 (금)
크게 작게
민 상 기(‘역사가 말 못하는 것’ 저자)

나무가 자라면서 많은 가지를 갖게된다. 아무리 여러 모양의 많은 가지를 갖더라도 하나의 나무이다. 소나무면 소나무, 대나무면 대나무이지 가지에 따라 나무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요즘 한국에서는 민주주의라는 나무에 자유라는 가지 이름을 앞에 붙여 민주주의를 속박하는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이 지난 반세기동안 피와 땀으로 지켜낸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으로 우리들의 삶 그 자체이다. 우리들에게는 물이고 공기요 햇빛과 같은 것이기에 어떤 부차적 수식어를 요하지 않는다. 뮬은 물이요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 족하다. 도자의 도(道)나 공자의 인(仁)일 뿐이다. 자유민주주의라고 자유를 내세우는 것은 평등과 관용을 적대시하며 배제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이런 독선적 배타식 태도는 우리가 하루속히 벗어나야 할 우리역사의 고질적 병폐이다.


우리 나라가 유교전통의 나라였다지만 기실 유교라는 큰 나무를 본 것이 아니라 주희 한 사람의 주장에만 매달려 그와 다른 의견의 유교인식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온갖 박해를 가했다.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억압받은 것이다. 우리가 주자학에 빠져 우물안 개구리신세였을 때 일본은 같은 유교전통의 나라였다지만 유교나무 전체를 보며 특히 양명학(陽明學)이 명치유신에 기여 현대국가로 변신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의 경우 그냥 민주당과 공화당이지 자유민주당이나 자유공화당이라 부르지 않는다.

일본은 예외다. 일본에서는 1955년 사회당의 등장에 보수세력인 자유당과 민주
당리 자유민주당을 세워 장기 집권했다. 우리현대사에도 자유롭게 독재했던 악명 높은 자유당이 있었고 군사독재시대에는 민자당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내세울수록 독재시대였음을 경험했던 사람들에게는 ‘자유’라는 표현에 민감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나무의 가지만 붙잡고 늘어지는 쪽과 나무 전체는 보는 쪽의 시국관이나 역사관에는 차이가 있음을 경험한다. 사람의 몸이나 나라는 유기체이기에 기계 부속품 다루듯 쪼개다보면 삶을 잃는다. 환자가 전문의만 찾아다니며 가정의를 멀리하면 ‘수술은 성공했으나 환자는 죽었다’는 이야기가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가지가 아니라 나무를 보겠다는 의식전환이다.
삼국통일시대를 사셨던 원효 스님의 일심(一心)에서 우러난 화쟁(和諍) 과 무애(無碍)의 정신을 본받을 때라고 믿는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