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도 어쩌지 못하는 나라 사랑

2011-12-03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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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경
대학강사^수필가

남편이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 근교인 겐트에서 안토니와 함께 논문을 발표하게 되었다. 전산 학회라서 나도 참석키로 했고, 안토니의 아내 마아틴도 참석한다고 했다. 우리보다 10여년 연상이지만 6년 전 학회에서 만난 후 친구가 된 두 부부는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루 전에 도착한 우리는 ‘겐트’ 특유 아기자기한 중세기 건물이 즐비한 거리를 돌아보며 그 화려함에 감탄사를 연발하다가, 한국인 관광객들을 만났다. 반갑기는 한데 아는 체 할 변죽이 없어 그냥 지나쳤다. 남편은 이국에서 만난 동족인데 인사 말도 없이 지나친다며 뭐라 했다.


몇 시간 후 강가를 걷는데 그들이 탄 배가 지나갔다. 내 옆구리를 찌르던 남편이 참다못해 “안녕하세요!” 외쳤다. 서양인의 갑작스런 인사에 그들 모두 활짝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합창해 주었다. 그제서야 나도 반가움을 표현하며 답인사를 외쳤다. 남편은 내 대신 동족을 돌본 듯 우쭐댔다.

다음날 학회의 강행군이 시작됐다. 화가이지만 전산의 역사와 철학을 다루는 독특한 학회여서 그림의 소재를 얻기 위해 참석했던 마아틴은 이해하기 어려운 발표 때는 간간이 주변관광을 나섰다. 내 분야가 아닌 발표 때는 나도 같이 나섰다.

많은 겐트 사람들이 불친절하여 내가 불평을 하니, 마아틴은 불친절한 것이 아니라 무뚝뚝하거나 무관심한 것이라 했다. 프랑스인이야 말로 불친절하다며 자신도 프랑스인이면서 한참이나 프랑스인들에 대해 불평했다. 그녀는 내가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친절한 사람들 중의 하나이건만.

안토니는 독일의 미디아 예술대학 교수이지만 영국인이다. 그들은 결혼 후 30년 이상 런던에서 살다가 5년전 프랑스 남부 ‘아를’로 이사했다. 그녀는 특히 그 동네사람들이 불친절하고 무식한 것을 이사 가서 알았다며, 영국에서 살던 때가 무척 그립다 했다. 마침 학회 후 우리가 며칠 들리기로 되어 있어, 이번에 직접 경험을 해보라며 경고까지 했다. 프로방스 지방이고, 내가 좋아하는 고호가 살았고, 로마시대의 원형경기장, 야외극장으로 유명한 도시라 로맨틱한 여정을 기대하고 있던 차에 은근히 서늘해졌다.

학회를 주최했던 겐트 대학의 엘리자베드와 남편 마틴은 안토니의 학생이었던 관계로 안토니 부부와 격의 없이 친했다. 둘 다 겐트 사람이지만 파리대학에서 일하는 남편 때문에 파리에 사는 엘리자베드는, 저녁식사를 하던 중, 프랑스인들의 비논리적, 비이성적, 야만적이면서 콧대만 높은 것이 지겨워서 이번에 겐트로 이사한다며 끊임없이 프랑스인 불평을 늘어놓았다. 한참 말을 거들던 마아틴이 서서히 입을 다물었다.

학회가 끝나고 ‘아를’로 가는 비행기에서 마아틴이 말했다. “에리자베드가 프랑스인을 욕할 때, 처음엔 같이 욕했는데 한참 듣다 보니까 듣기 싫더라구. 30여년을 영국에 사는 동안 프랑스인을 욕하면서 영국인 행세를 하며 살았지만, 결국 내 속엔 나도 어쩌지 못하는 프랑스 사랑이 있었나봐. 프랑스인에 대한 욕은 프랑스인이 해야 들어줄 수 있는 거야.”

나 또한 한국인 불평을 자주 하는데, 그건 한국인들하고 있을 때만이 아닌가? 남편이 한국인 불평을 하면 신경질부터 부리지 않는가? 근무처와 집의 국적이 전혀 다른 유럽인들조차 그러니 내 경우는 그래도 낫지 않은가? 우리 인간들에게 진정한 ‘지구촌’의 가능성은 있기나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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