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죽음으로써 살아난 것

2011-11-1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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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욱 객원논설위원

“...마음이 쪼그라질 정도로 어마한 남벽 아래 서서 긴 호흡 한 번 내쉬고 없는 길을 우리는 가야 한다. 길은 오로지 우리 몸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밀고 나가야 한다. 어떤 행운도, 어떤 요행도 없으며 위로도, 아래로도 나 있지 않은 길을 살아야 돌아와야 한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산악대원이 쓴 글귀 중 한 부분이다.

지난 달 10월18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벽에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려 도전했던 박영석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이 불행을 당했다. 대한산악연맹은 이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13일 동안 수색작업을 벌였다. 실종된 이들을 찾지 못한 대한산악연맹은 지난 11월3일 서울대 병원에서 최초의 산악인장으로 합동영결식을 가졌다. “왜 산에 가냐고 묻는다면, 산이 있어 간다”는 말이 있다. 산사나이들의 말이다. 산사나이란 산을 좋아하는 남자들을 말한다. 산을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산을 사랑하는 남자들의 그 측도는 죽음까지도 그들의 산에 대한 사랑을 막지 못한다. 즉, 죽음도 불사하는 그들의 산에 대한 사랑은 그 누구, 그 무엇도 막을 수가 없다.


박영석(48세). 그는 지난달 13일 동료 대원들이 만들어준 생일 케이크를 자르며 마흔 여덟 번 째 생일을 안나프르나 베이스캠프에서 맞았다. 그는 고교 때 서울시청 앞에서 카퍼레이드를 벌이는 마나슬루(8,164m)원정대를 보고 산악인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동국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한 뒤 산악부에 가입해 산꾼(산사나이)이 되었다. 그의 등반 기록은 놀라움 그 자체다. 1993년 아시아 최초로 에베레스트(8,848m)를 무산소로 등정했다. 그 후 2001년까지 8년 동안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세계 최단 기록으로 등반했다. 2002년 7대륙 최고봉을 완등했다. 그리고 2005년 3극점 도달까지 마무리 지어 ‘인류 최초의 그랜드슬래머’란 호칭을 받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는 일반 산악인과 다르다. 등로(登路)주의자다. 등로주의란 남이 닦아 놓은 쉬운 길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길, 힘든 길을 셀파나 산소탱크 등 특수장비 없이 오르는 산악인을 말한다. 그는 이렇게 2009년 히말라야 남서벽에 다섯 번의 도전 끝에 코리안 루트를 뚫었고 이번에도 남벽에 새로운 코리안 루트를 뚫다가 변을 당했다.박영석원정대의 비보가 채 가라앉기도 전인 지난 11월11일 박영석수색에 참여했던 한국 산악인 2명이 또 추락사했다. 히말라야 촐라체(6,440m) 북벽을 오르던 김형일(44)대장과 장지명(32)대원이다. 시신은 12일 오전 4,700m 지점에서 발견됐다. 그들은 추가 베이스캠프 없이 정상까지 단 36시간에 왕복하는 알파인 등반이 목표였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났지만 산을 모르다 어느 지인의 안내로 미국에 와서야 산을 알게 됐다. 함께 등반하는 등반인들에게 항상 얘기하는 것이 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안전”이라고. 그러면 어느 사람은 “너무 소심하다”고 말한다. 소심해도 좋다. 전문산악인이 아닌 그냥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산에서 다치는 것은 좋지가 않다.

주말엔 시간이 나면 산을 찾는다. 낮은 산들이다. 뉴욕과 뉴저지 인근의 산들은 높아야 1,500피트 정도다. 베어마운틴, 웨스트마운틴, 팀, 던더버그, 세븐힐스 등등. 약 2시간반 정도 운전해 뉴욕업스테이트 캐스킬에 가면 높은 산에 오를 수 있다. 케스킬에는 인디안 헤드, 트윈, 위텐버그 등등 3,500피트에서 약 4,000피트의 산들이 있다. 산에 오를 때 마다 자신에게 마음속으로 질문하는 것이 있다. “너도 산사나이들처럼 산에서 죽을 수 있냐?”고. 대답은 “없다”이다. 아직도 산을 사랑하는 정도가 산에서 죽을 만큼은 아닌가 보다. 그러나 언젠가 히말라야 같은 높은 산에 등정할 기회가 되어 등정할 수만 있다면, 산에다 목숨을 걸어야 될 것임은 각오하고 있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박영석을 기리며 “그는 산에 못 가게 하면 죽는다. 그는 죽음으로써 살아난 것이다. 그가 대중 앞에 잘 나서지 않은 까닭은 스스로가 잘나서가 아니라 산이 자신을 살려서 그랜드슬럼이 가능했다는 겸손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겸손했던 박영석. 그는 산에서 죽었지만 산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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