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족발이든, 감자든

2011-11-1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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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병 임(논설위원)

미국 중산층의 은퇴 희망연령이 80세까지 올라갔다. 완전히 늙어서 허리가 꼬부라져서도 일하겠다는 것이다. 경제 침체로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16일 발표된 웰스파고 은행의 이 전화설문 조사는 연간소득 2만5,000~9만9,000달러의 중산층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는데 응답자 1/4이 80세까지 일해야 한다고 답했다는 것이다. 사회보장제도에서 지급하는 혜택이 줄어들고 모기지 상환이 힘들어진 것이 중산층의 마음을 이처럼 무겁게 한 것이다.또 미국경순찰대 최근 자료에 따르면 멕시코 불법이민자의 월경 루트인 캘리포니아주, 애리조나주, 뉴멕시코주, 텍사스 주 등 4개주 국경지역이 요즘 한산하다는데 그 원인이 미국의 경제침체로 일자리가 감소한 탓이라고 한다.

미국이 왜 이리 인기가 없어졌을까? 잘 나가는 전성기의 도시에는 합법이민자든 불법이민자든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어 복작거린다. 그곳에 먹고 살 꺼리가 있기 때문이다. 생의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도시는 미래가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소설 ‘은빛 피렌체’를 읽다보면 눈에 들어오는 글귀가 있다.16세기 전반을 무대로 주인공인 마르코가 피렌체의 아르노 강에 걸려있는 베키오 다리 위의 푸줏간 시장을 지나는 대목이다.


‘이 길을 지나갈 때면 마르코는 언제나 인간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감동하는 동시에 즐거워지기도 한다. 푸줏간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채 모락모락 김을 피워올리고 있는 족발들, 큰 솥에 끓이고 있는 수프에 모여드는 수수한 차림의 아낙네들을 보면, 식사 준비에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못하는 그녀들의 바쁜 일상이 짐작되어 숙연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삶은 족발을 물어뜯고 이집트콩이 동동 떠있는 수프를 후루룩 거리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미소가 떠오른다.’

이렇게 활기찬 푸줏간 시장은 그이후인 16세기 말, 피렌체를 통치한 페르디난트 1세가 비위생적이라고 귀금속점으로 변화시켰고 현재 그곳은 유명한 귀금속 거리로 사람들이 붐빈다.‘언제나 인간은 얼마나 필사적으로 열심히 살고 있는지’ 하는 표현이 난, 참으로 마음에 든다.

뉴욕에는 멕시코인, 하이티인, 한인 등 전세계인들이 너도 나도 청운의 꿈을 품고 이주해와 건축 현장, 청과물 센터, 농장 잡일을 하면서 치열하게 살고 있다.우리 주위에는 새벽 4시면 자동인형처럼 발딱 일어나 일터로 뛰어나가고 친정이나 시댁 부모에게 갓난아기를 떼어놓고 악착스레 일해 모은 종자돈으로 네일가게를 열고 세탁소로, 델리로 업종을 바꿔가며 늘려가는 한인들이 있다.
자신의 신성한 노동으로 열심히 사는 이들은 남의 것을 부러워하지도, 탐내지도 않는다. 묵묵히 깨끗하게, 정직하게 번 돈으로 자신이 목표한 아메리칸 드림을 차근차근 달성해 나간다. 그런데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거칠고 힘든 일자리마저 사라지다보니 아메리칸 드림이 퇴색해가고 다들 80세까지 일한다고 한다. 직장 잃고 모기지 체납으로 집을 차압당한 자, 병든 자, 있던 돈마저 사기 당한 한인 홈레스도 늘고 있다.

소설 이야기가 나온 김에 그림 이야기도 해보면 빈센트 반 고호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란 그림이 있다. 하루의 힘든 노동을 끝내고 어두운 저녁 식탁에 둘러앉아 감자를 먹는 가족들, 남루한 살림살이지만 석유등불 아래 감자를 나눠주고 먹는 거칠고 투박한 손들, 이 얼마나 성실하고 정직한 손인가. 족발이든, 감자든, 배고픔을 면하게 해주는 먹을 것은 숭고하다. 초가집이든, 마굿간이든, 추위와 바람을 피할 수 있는 하룻밤 잠자리는 눈물겹다. 인간이 인간에 의해 인간 대접을 받아야 하는 계절이다. 주위의 불우이웃에게 따스한 밥 한끼, 하룻밤 포근한 잠자리를 제공하자. 불우이웃과 사랑을 나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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