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만추(晩秋)

2011-11-1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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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철(목사/수필가)
11월은 그 정체가 좀 아리송하다. 계절상의 소속도 분명치 않다. 가을과 겨울의 고빗길에 끼어있으니 말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11월은 저물어가는 가을이다. 그래서 ‘만추’라면 11월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맑게 개인 날이라야 가을의 서정이 느껴질 뿐 잔뜩 하늘이 찌푸린 날이면 바로 겨울의 황량함을 안겨준다.

같은 날씨도 사람에 따라 달리 느껴지게 될 것이고, 같은 가을을 노래하건만 동서양 시인들의 감정이 같지 않아 서양의 시인들은 감미로운 낭만을 안겨주는 10월을 즐겨 부르는가 하면, 동양의 시인들은 예부터 11월을 즐겨 불러왔다. 청승맞은 생리 때문만은 아니리라. 그저 구슬픈 심경에 젖어 들게 하는 일들이 많았고, 그런 심경에는 11월의 계절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몽주가 살해된 다음에 비슷한 운명을 겪게 된 이숭인(李崇仁)에게 이런 시가 있다. 不見鄭生久, 秋風又颯然, 新篇最堪誦, 狂態更睡憐. “그대 못본지도 오래였구료, 하마 가을바람 쓸쓸히 부는데, 새로 지은 시 한편은 잘 읽었다만, 이 몰골 뉘라서 가여워하리.” 이 시 속의 가을은 분명 11월을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게 도은 (陶隱·이숭인의 호)의 심경에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니 말이다.


그런가 하면 한편 단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양녕대군도 노래하기를, 龍御歸何處, 愁雲起越中, 空山十月夜, 痛哭訴蒼穹. “아아 님은 어디로 가셨는가, 구름도 애달피 감도는 영월의 텅빈 10월의 밤하늘을 향해, 야속함을 울부짖는 이 마음이여!” 단종이 꼭 음력 10월에 죽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단종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인의 마음은 11월이 가장 어울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화에 말려들어 희천(熙川)에 유배되었던 김굉필(金宏弼)의 다음과 같은 시도 음력 10월에 지은 것이라 짐작된다. “한가이 사노니 오가는 이 없고, 밝은 달만 쌀쌀히 비춰 오누나. 내 생애 어떤가를 알고 싶거든, 앞강물 뒷동산에 물어나 보렴”

우리도 어느덧 11월 중순에 접어들었다. 무심코 지내다가도 문득 두 장 밖에 남지 않은 달력을 보게 되면 유수같은 세월에 갈피를 잡지 못해 구슬픈 감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름답던 단풍도 변색하여 그나마도 다 져가고 있다.
이슬을 머금은 국화의 청초함도, 텅빈 들에 홀로 핀 장미꽃의 오만스러움도 모두 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마지막 앙탈처럼 안쓰럽기 그지없는 11월이 깊어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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