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여유가 필요한 삶

2011-11-1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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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주 영(주필)
한국 사람들은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성질이 급한 편이다. 사탕도 빨아 먹지 않고 깨물어 먹고 술도 빨리 취하라고 ‘폭탄주’를 마시며, 고기를 구울 때 익기 전에 자꾸 뒤집는다. 한인업소에서 일하는 타민족 종업원이 맨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이다.

최근 한국의 종합정보조사회사 지노스 알앤씨가 성인남녀 5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성질 급한 한국사람 베스트 10’을 꼽았다. 1위는 ‘상대방이 통화 중인데도 그 새를 못 참고 3번 이상 전화하는 사람’이 꼽혔다. 잠시 기다렸다 다시 하면 되는데 “그 사이에 통화가 끝났을지 모른다”며 계속 다이얼을 누른다.이 이색적인 설문조사에서 2위는 ‘마켓 계산대 앞에서 짧은 줄을 찾아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뽑혔다. 컵라면에 물을 붓고 3분을 못 참아 계속 젓가락으로 휘젓는 사람(3위), 커피 자판기의 ‘동작 완료’ 불이 꺼지기도 전에 컵을 꺼내는 사람(4위), 노래방에서 남의 노래 반주를 중간에 꺼버리는 사람(5위), 지하철 환승역과 빠른 이동경로를 줄줄 외는 사람(6위), 수업종료 종이 울리기도 전에 가방을 챙기는 학생(7위)도 베스트 10에 선정됐다.

물론 빨리 빨리 정신이 골육상잔의 폐허 속에서 경제부흥을 일구게 했고, IMF위기를 기적적으로 벗어나게 했으며, 다른 어느 개발도상국가보다 빨리 경제대국과 G20정상의 반열에 올라서는데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안으로는 보이지 않게 잃어버린 것들도 적지 않다. 이곳 한인사회에서도 그동안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다가 신체적으로 또는 정신적으로 제동이 걸려 꼼짝 못하는 한인들이 꽤 있다.


‘빨리 빨리’ 문화는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자칫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안식과 평온을 빼앗아 가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는 말처럼 일을 빨리 빨리 한다는 게 오히려 결과적으로 시간이 더 걸릴 수 있다. 수년전 세계를 놀라게 한 한국의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좋은 예이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세상일에 쫓기게 마련이다. 그런 사람들이 거두는 것은 정신적 신체적 고갈이요 결국은 인생의 실패이다. 이제는 한인들도 좀 쉬엄쉬엄 갈 때가 됐다. 그동안 앞만 보며 빨리 빨리 달려온 분주한 삶속에서 잃어버렸거나 놓쳤던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여유도 필요하다. 돈으로만 자신의 가치를 환산할 수는 없지 않는가?

캐나다 리젠트대학의 마르바 던 교수(영성신학)가 오래전에 ‘안식’을 주제로 책을 출간했다. 그는 안식을 그침, 쉼, 받아들임, 향연의 네 단계로 요약하고, 특히 첫 단계인 그침은 모든 생산적인 일뿐만 아니라 성취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던은 그침이야말로 인간이 인간임을 선언하는 행위이며 욕심과 근심의 그침을 통해서 인간은 비로소 참다운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일단 멈춤과 여유가 없는 생활은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마음의 행복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얼마전 신경정신의학회가 성인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행복과 스트레스’에 관한 인식조사를 실시했다. 학회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21.2%는 일상생활을 통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했고, 5.1%는 ‘아주 많이’ 받는다고 답했다. 경기가 점점 악화되고 일자리가 갈수록 줄어드는 요즘 스트레스를 안 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부자 1%를 제외하고 아마도 99%의 서민이 다 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그렇다고 무조건 빨리 빨리 달린다고만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던 교수의 말처럼 그침을 갖고 쉼을 반복 하면서 마음에 안식과 여유를 갖는다면 이 어려운 세파를 견디어낼 뿐 아니라 장차 더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던 일이 뜸도 들기 전에 도중에 내팽개친 일이 많았다. 모처럼 큰마음으로 착수했다가 조급해 결과를 기다리지 못하고 도중하차한 일도 많았다. 무슨 일에나 있게 마련인 고비를 잘 극복하면 의지력과 지혜의 문이 열린다. 수확의 이 계절에 우리는 무엇을 거둘 것인가. 법정스님이 던진 질문이 머리에 떠오른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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